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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Dec 27. 2021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사랑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겁이 많던 나는 눈만 크게 떠도 간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겁이 나면 눈을 크게 뜨고 표정을 감췄다.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된 감정 감추기는 자라면서 능숙해졌다. 속상해도, 슬퍼도, 화가 나도 어쩔 때는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권위적이고 유교적인 양육을 했던 나의 부모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했던 말씀이 "본이 되어라."와 "부모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애쓰듯이 자식도 부모의 명예에 먹칠해서는 안된다."였다.


자라면서 나는 거의 야단맞은 적이 없다. 몇 번 있었지만 납득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가 하는 일이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고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해서 어린 내게 발언권이 있던 것은 아니기에 내가 선택한 길은 '입을 닫는 것!'이었다. 잘해도 욕을 먹고, 잘못해도 욕을 먹는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일. 그것이 공부이든, 봉사이든, 그 무엇이든 시키는 일은 '순종'이라는 이름하에 군말 없이 했다. 그리고 속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초중고 시절 나는 부모님께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의 말을 듣고 자랐다.




나의 삶은 세 번의 큰 축으로 변화를 겪었다. 변화를 통해 성격도 삶의 태도도 많이 변했다.


첫 번째는,


14살의 10월. 핏덩이 손녀를 세상 누구보다 귀히 여기고 가난 속에서도 '미스코리아 뺨치게 이쁘게 자랄 테니 걱정 마라!' 선포하시며 죽는 날까지 그 많은 손녀들의 이름을 모두 로운이라 부를 만큼 사랑을 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미새를 잃은 연약한 새끼가 되어 1년 동안은 매일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지 생각했었다. 나의 세상은 사라졌고 온통 암흑만 가득했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나날을 보냈다.


어쩌면 그 시절 담임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를 맡은 김미숙 선생님은 내게 생명의 은인이자 평생의 은사님이다. 말없고,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내가 이상히 보였던 선생님께서는 따로 불러 일기를 매일 써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으라는 개별 과제를 내주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써왔던 나는 늘 쓰던 일기장에 그날, 그날의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다. 선생님은 '로운'이라는 아이가 궁금하여 일기장을 처음부터 모두 읽어보셨고, 나의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봐주셨다. 그리고 반 아이들과 다른 배려를 해 주셨다. 편지를 써주셨고(아직도 지니고 있다.), 좋은 시(한용운 님을 좋아하셨다.)를 매일 예쁜 메모지에 단정한 글씨로 써서 주셨다. 그리고 선생님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셨고, 힘들 때는 언제든지 선생님을 찾아오라 말씀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를 잃었지만 선생님을 만남으로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혼자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마이마이가 분신이 되어 양쪽 귀에는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세상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도록 온통 볼륨을 높인 노랫소리로 내 귀를 채워 넣었다. 친구는 중학교 때 4명, 고등학교 때 2명이 전부였다. 그 외의 아이들에게는 다가가지도, 다가온 친구를 맞이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숨 쉴 수 있는 만큼의 친구만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직도 내 안에 계신 할머니는 여전히 '그리움'이다.




두 번째는,


죽을 뻔했던 내 인생 첫 휴가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에 함께 간 적이 없었다. 멀미로 차를 잘 못 타서 여행을 가서도 일주일, 다녀와서도 일주일 심한 몸살을 해야 했기에 대부분의 짧은 여행은 나를 뺀 부모님과 오빠, 셋만 다녔었다. 나는 집에 홀로 남았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차를 못 타서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였고,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나만 홀로 있는 시간은 내게 외롭지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가족의 틈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느꼈던 적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었고, 나는 그 선택에 불만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일가친척들과 함께 간 여행에서 나는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사고를 겪었다. 이후 나는 계곡에 가지 않는다. 3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를 죽음으로 몰고갈 뻔한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이전보다 훨씬 더 물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후 수영을 접영까지 배웠지만 여전히 물이 싫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물을 싫어하는 엄마를 만난 탓에 내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겨보지 못한 채 자란 것이다. 큰 아이가 18년 동안 엄마와 함께 간 물놀이가 겨우 한 번인 것을 보면 내가 물을 싫어하기는 엄청 싫어하나 보다.




세 번째는,

2016년 악성 종양이 예상된다며 시한부 한 달 선고가 주어졌을 때이다. 다행히도 잘 치료받았고 나는 지금 살아있다. 죽음을 앞두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주마등처럼 지난날들이 흘렀고, 만약 살게 된다면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보너스 인생을 살아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보너스로 얻은 삶을 살고 있다. 힘들어도 아파도 조금 외로워도 슬퍼도 울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악착같이 살아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보너스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매일이 감사한 나날이 되었다. 아이들은 선하게 잘 자라주고 있고, 남편은 자기 삶을 충실히 살며 가정을 살뜰히 살펴준다. 이보다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사치다. 분수에 넘칠 만큼 값진 삶이 매일매일 내게 다가온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고 싶고, 노력한다.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준 세 번의 역경까지 감사히 받아들였다.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과하게) 친절을 베풀 때도 있다. 하지만 억지로, 가식적으로, 목적성을 두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서 다가갔고, 다가온 사람에게 진심을 다했다. 적어도 50이 문턱에 다가오는 지금의 나는 토마토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내가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순간에, 나는 위로라고 했던 말이, 내가 친해지려 다가갔던 그 순간에, 혹은 내가 아파 외면하고 살았던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나도 모를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었고, 그 상처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산 48년 속에서 적어도 25년은 나도 죽어라 애쓰며 힘겹게 살아왔기에 옆도 뒤도 볼 수 없을 만큼 숨 막히던 과거가 있었고, 그런 시간들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있으리라 생각한다.


살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서니 조금 나아진 미래가 오는 것임을 이제 알 나이가 되었다. 그 시절, 그 순간은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옛말 할 수 있는 일화로 남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하며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죽음과 마주하며 그것을 극복한 뒤 얻은 새 삶에서 나는 "오늘만 사는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을 후회 없이 잘 살자!"라고 다짐했다. 갑자기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밀물처럼 후회가 밀려왔었다. "껄껄껄"하며 후회해봤자 어차피 죽고 없으면 다 무슨 소용이랴. 죽음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서 오늘 현관을 나서며 갑자기, 자다가도 갑자기 맞을 수 있는 것이 죽음이다. 나는 내일 죽어도 후회 없을 만한 오늘을 살고 싶다.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나도 상처 받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았지만 뜻대로, 생각대로,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또 인생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싶다. 이전에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살 거다.



열심히 오늘을 사는 로운입니다.










덧붙이는 말.


최근에 제 과거의 어느 날,

저로 인해, 제 가족으로 인해 상처 받았다는 분이 댓글을 주셨습니다. 누구신지도 모르고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모르는 새 저와 글벗이 되신 작가님들의 글에도 댓글이 달렸을지 모릅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로 글을 썼을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작가님들께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혹시 작가님들의 소중한 글에 글과 상관없는 댓글이 달린다면 제가 이곳에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해도 오점이 될 거라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런 댓글을 받으셨다고 제게 알려주시면 제가 정중히 다시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글 속에 남기는 것 밖에 없어서 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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