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능이 떨어지니 굵은 면 음식은 피하게 되고, 돈가스, 탕수육, 파전, 새우튀김처럼 보기만 해도 군침이 꿀꺽 도는 기름에 튀긴 음식도 즐기지 않아요. 학교급식을 이십여 년 먹다 보니 자극적이거나 짠 음식도 피하게 됐어요. 이렇게 편식이 심한데도 밥 한 그릇 뚝딱 하게 만드는 음식이 있어요. 하물며 자극적이고, 기름지고, 짠맛이 매혹적인 그런 음식 말이에요.
초등학교 4학년에 만나서 초, 중, 고등학교 시절 모두 단짝이 되어준 미정이가 생각나네요. 미정이에게는 언니, 오빠, 남동생이 있었죠. 빈 집이 싫고, 외로왔던 어린 로운에게 미정이네 집은 아지트가 되어줬어요. 특히 미정이의 엄마가 차려주신 밥상은 정말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었죠. 미정이의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은 편식하던 로운이도 순삭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어요.
일요일마다 미정이와 교회에 갔어요. 그 시절은 아이들 놀거리가 많지 않을 때라서 주일학교가 놀이터가 되어주었죠. 교회에 가면 선물과 간식도 주었거든요. 선물로 받은 공책, 연필, 스케치북, 크레파스... 덕분에 학교에서 준비물을 챙겨 오라 해도 걱정이 없었어요. 대예배가 끝나면 주는 점심도 꿀맛이었어요. 교회밥이 유난히 맛있는 이유는 바로 미정이의 엄마 손맛 때문이에요. 일요일이면 교회 식당에서 음식 봉사를 하셨거든요. 그중 제일 맛있는 음식은 육개장이에요. 한 입 넣으면 입에서 불이 나올 것처럼 매웠지만 정말 맛있어요.
너무 매워 눈물 쏙, 땀이 뚝뚝 흐르는 맛이라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 번갈아 먹던 미정이의 엄마표 육개장에는, 잘게 찢은 쇠고기, 대파, 토란대, 고사리, 숙주가 아낌없이 들어 있었어요. 집에서도 육개장을 해 주셨지만 교회에서 먹던 육개장이 더 맛있었어요. 왜냐고요? 교회밥에서는 음식 솜씨 좋으신 미정이의 엄마 손길이 스쳐 마법처럼 감칠맛이 났거든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어릴 때 먹던 그 육개장 맛이 그리워요. 갖은 야채 가득 든 미정이의 엄마표 육개장이 먹고 싶지만 그리운 추억의 맛으로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어요. 여느 음식점에 가 보아도 추억의 맛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좋아하는 '이화수육개장'과 '육대장'
제가 좋아해서인지 아이들도 잘 먹어서 육개장으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어요. 육개장에 불린 당면을 넣은 당면 육개장, 떡국떡을 넣은 육개장 떡국, 찹쌀과 맵쌀을 섞어 육개장 죽으로도 만들어 먹어요. 넣는 재료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어떤 재료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그 맛이 일품입니다. 입맛 없고, 반찬 집어먹기조차 귀찮을 때 육개장은 한 그릇 뚝딱 밥으로 그만이에요.
다양한 음식으로 변신 할 비상용 육개장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 치킨, 고기, 또 고기...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들이죠. 20대의 로운이도 좋아했던 메뉴였지만 지금은 왜 어른들이 '밥심'으로 사는 거라셨는지 알 것 같아요. 밥을 먹어야 힘도 나고, 속도 편해지니 말이죠. 예부터 주막에서 팔던 서민 음식으로 '국밥'이 있잖아요? 반찬도 필요 없이 간이 딱 맞는 국 한 사발에 뜨끈한 밥 한 그릇이면 산해진미 부럽잖죠. '육개장'은 딱 그런 느낌, 그런 맛이에요. 국밥 한 사발이면 충분한 그런 맛이요.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3월, 햇살은 따사롭고 그늘진 곳은 서늘한 요즘 날씨에 딱 어울리는 밥 한 끼, 육개장이 생각 나는 월요일입니다.
[보글보글 시즌1]의 마지막 주제가 '밥'이었어요. 아무리 맛난 것이라도 두 번, 세 번 먹으면 물리잖아요? 그런데 밥은 매일, 매끼를 먹어도 물리지 않죠. 저에게 '보글보글'이 그랬던 것 같아요. 브런치 외의 플랫폼에도 글을 쓰고 있지만 '브런치'는 '밥' 같아서 물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공간이 되었어요. 이곳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도 귀하고, 함께 나눈 글들을 더 귀하고 말이에요.
함께 해 주신 작가님들...
함께 글을 쓰고 싶다고 제안드렸을 때,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보글보글'에서 많은 작가님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성장했고,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사랑해 주시고, 기억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많은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