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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Nov 16. 2020

용기가 필요한 순간 '조반나'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에 대하여

<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책의 표지를 응시했다.

마음에 남은 여운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고민이 됐다.



식탁 아래로 한 남자의 다리가 한 여자의 발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옆에서 가만히 누워 그 은밀하고도 위협적인 광경을 바라보는 한 소녀의 쓸쓸한 뒷모습이 초라하게 그려져 있다. 보이지 않는 소녀의 얼굴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충격과 혼란이 전해진다.



소설 속 주인공 조반나가 처음으로 엄마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을 묘사한 장면이다. 두 남녀의 다리가 교차하는 모습은 거대하게 비약된다. 반대로 그걸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은 비약적으로 왜소하다. 원근법이 무시된 초현실적 구도가 소녀였던 저 때의 주인공의 심리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소녀는 아직 어른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진실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어렸고 연약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날의 사건은 자아가 위태로웠던 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강렬하고 파괴적인 기억의 씨앗으로 남았고, 그 씨앗은 그녀의 정체성에 깊게 뿌리를 내린다.



'그 일은 우리 집의 길고 긴 위기의 종지부이자

어른들의 세계로 가기 위한 나의 힘겨운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가는 여정 동안 그녀에겐 매우 중요했던 몇 번의 결정적 순간들이 존재했다. 경멸의 대상이었던 상상 속의 빅토리아 고모를 용기 있게 마주한 순간이 그랬다. 엄마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목격하고, 부모님의 어긋난 결혼 생활을 지켜보며 어른들의 적나라한 진면목을 발견했을 때가 그러했다. 처음으로 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사랑이란 것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도, 관념 속에만 존재하던 '성'의 실체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순간들은 그녀의 삶을 그 사건의 이전과 이후로 나눠준 중요한 구분점이 되어준 성장의 계기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계기가 모여 성인 '조반나'라는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성장과정을 보며 조금은 비슷해 보이는 나의 성장과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삶을 마주하고 살아갔다. 때로는 두려워했고, 때로는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지만 결코 피하진 않았다. 빅토리아 고모의 조언처럼, 모든 것들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노력하며 살았다. 용기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의 어떠한 순간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부딪히는 그녀의 태도는 그녀보다 나이가 많지만 한참이나 부족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힘. 나는 그녀처럼 용감하지 못했고, 스스로에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을 통해 나 또한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내 과거와 내면을 다시 한번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중요했던 계기점들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또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의 화자가 '여성'이란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해 볼 수 있는 새롭고 강렬한 체험이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내 경계를 뛰어넘는 '무경계'의 시도를 또 한 번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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