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블랜드라는 이름의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자가 작은 도시로 차를 몰고 갔다. 그녀는 키가 컸고 외모도 수려했으며 성격이 시원시원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신실한 크리스찬이었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며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런 여성이었다.
2015년 7월 10일, 한 백인 남성 경찰관이 도로를 주행하는 그녀의 차를 멈춰 세웠다. 그는 블랜드가 차선 변경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면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블랜드는 대답하다가 차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경찰관은 담배를 꺼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경찰차 계기판 위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에 녹화됐는데, 유튜브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수백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적어도 처음엔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정중했다. 대화는 작은 언쟁으로 번졌고, 상황은 블랜드가 체포되어 수감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샌드라 블랜드는 유치장에서 자살했다.
<타인의 해석> 시작 부분 요약
책은 이러한 사례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깜빡이를 켜지 않아 경찰관에게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한 미국계 흑인 여성이 자살을 하게 된 비극적인 이야기. 전부 옮기지는 못했지만 블랜드와 경찰관이 나눈 그때의 대화가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책에 기록되어있다.
왼쪽: 샌드라 블랜드 / 오른쪽 : 그녀가 체포되었을 당시 계기판에 녹화된 모습
대체 깜빡이 하나 제대로 안 켰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분명 이건 흑인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유린한 오만하고 악한 백인 경찰의 잘못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나의 반응은 이랬던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 비극적인 사건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처음 사건을 접한 여론의 반응은 이러했다. 대중은 분노했고 여론을 들끓었다. 경찰관은 해임되었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인권유린이자 인종차별 사건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까지는 말이다.
책의 말미에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백인 경찰관 브라이언 엔시니아가 조사관과 나누는 면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그는 그의 행동에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는 경찰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고, 그만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그와 블랜드가 나눈 대화를 살펴보고, 훗날 조사관과의 면담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그렇게 악한 인간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은 대체 왜 발생한 것일까?
"우리는 얼마쯤 지나서는 이 논쟁을 제쳐두고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나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해석> 28p
저자는 이 문제를 끈질기게 집착하고 파고든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양한 사례들을 수집하여 소개한다. 나아가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낯선 타인을 만나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일까?
영국의 총리 체임벌린은 여러 차례 히틀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가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라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는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다.
뉴욕에서 판사와 인공지능 중 누가 더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판사는 여러가지 종합적인 정보를 활용하여 판결을 내렸고, 인공지능에게 주어진 데이터는 피의자의 연령과 범죄 사실 혐의 기록뿐이었다. 누가 더 정확한 결정을 내렸을까? 결과는 근소한 차이도 아니었다. 컴퓨터가 25%나 더 정확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영국의 총리도 뉴욕의 판사들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채임벌린은 히틀러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독일을 방문했고 그와 만났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판사도 마찬가지다. 범죄자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외모, 분위기, 배경 등 모든 종합적 정보를 고려하여 판결을 내렸지만 컴퓨터 보다도 훨씬 낮은 정확도를 보였다.
이러한 모든 결정적 오판의 배경에는 잘못된 믿음이 존재한다. 바로 우리가 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내가 낯선 이를 만나 그를 정확히 탐색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이게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알지 못하거나 그와 소통하지 못하거나 그를 제대로 이해할 만한 시간이 없을 때, 우리는 행동과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타인의 해석>, 190p
샌드라 블랜드를 자살로 몰고 간 백인 경찰 엔시니아의 행동은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정당한 일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훈련받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는 우연히 그녀가 주행하는 차를 통해의심이 될만한 정황을 포착했고 오랜 시간 그녀를 추적했다. 갈수록 범죄 행위가 의심되는 수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일반인이 봤을 때 샌드라의 언행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엔시니아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작은 손짓과 행동 모두에서 미심쩍은 정황을 발견했고 경계했다. 그가 훈련받은 대로 말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지극히 정당햤던 과정과 방식을 통해 그녀를 범죄자로 인식했고 체포했다.
경찰관으로서 그의 정체성과 믿음은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어온 것이었다. 적어도 엔시니아에게 있어 그의 생각과 판단은 진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의 진실은 한순간 특정한 상황과 결부되어 편견과 오해라는 이름으로 작용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편향된 진실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우리는 진실에 편향돼 있다.
…
우리는 낯선 이를 해독하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절대 진실의 전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온전한 진실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올바른 방법은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타인의 해석> 중
나만의 진실에 편향되어 살아가는 우리. 그렇게 설계된 인간.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이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진정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아무 의심 없이 내린섣부른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의 두께와 어울리지 않게 저자가 던져준 질문과 핵심적인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하지만 책의 두께만큼이나 그가 던져준 메시지는 무거웠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나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