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죽음 이야기를 해야 죽음은 두렵지 않은 것이 된다. 인생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을 “쉬, 쉬”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야기를 억압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관습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조차도, 자기 죽음을 말하지 못한다. 가족이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을 마친 수료식입니다. 축복받아 마땅합니다. 빈소의 국화는 애도의 꽃이 아니라, 축복의 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면 영정사진을 꽃다발로 장식하고, 그 많은 손님이 한 송이 국화로 당신의 수료식을 축복해 주겠습니까? 부조금도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애도의 표현이지만, 죽은 자의 입장에서는 축하의 표현입니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아래면 한마디 더 한다. “제가 그곳에 먼저 가, 꽃다발을 들고 당신을 마중 나가 환영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다. “먼저 너의 죽음을 환영하는 연습을 해둬라.” 자기 죽음을 환영하는 최고의 연습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사랑의 절정은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