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칭찬을 원한다면
외모에 대해 지적하는 것만큼, 외모 칭찬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이런 습관이 완성된 이후로는 좀처럼 타인의 외모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졌다. 내 주변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으니 외모에 대한 지적/칭찬은 곧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친한 동생이 한 명 있는데 이 친구를 안 지 10년 째이다. 이 친구는 매번 만날 때마다 '나 살 쩠어'라고 (실제로는 마른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투정을 부린다. 이전에는 '아니야, 하나도 안 그래 보여'라고 대꾸해주었으나 페미니즘을 접하고부터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고, 그 친구는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외모에 대한 불만을 내비쳤다.
최근에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역시나 또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겨웠으나 나는 오랜만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나도 살 안 쩠어. 이쁘기만 한 걸'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친구는 표정이 편해 보였다. 나랑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외모에 대한 불만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나는 그 친구의 자존감 지킴이였다고. 외모에 대한 불평은 위로해달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페미니즘을 통해 외모에 대한 지적/칭찬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만, 나는 친구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대꾸를 하지 않았으려면, 내가 왜 대꾸를 하지 않는지, 외모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친구가 저절로 깨닫기를 바랐다. 무책임한 태도였다.
이미 직장과 동호회 등 수많은 모임에서 외모에 대한 지적을 들었을 그 친구에게, 잠깐이라도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이러한 부조리한 구조가 있으니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못된 거야,라고 말해준다고 해서 그 친구는 하루아침에 외모 지적에 강단 있는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그 친구의 속도를 고려한다면, 잠깐이라도 위로가 되는 외모 칭찬은 그래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차근차근 설명하고, 그 친구의 속도를 고려하기. 내가 페미니즘을 배운 것은 타인을 더 존중하기 위해서다. 내가 더 뛰어난 인간이란 것에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된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