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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당약사 Oct 09. 2022

저는 약학을 꿈꾸는 약사입니다

1형 당뇨인 약사 에세이 EP13

 문이 열리는 동시에 하얀 종이를 들고 있는 노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이들을 맞이하는 안내 직원은 그 종이를 받아 들고 바코드 스캐너를 이용해서 '삑! 삑!'거리며 경쾌한 신호음을 울린다. 이 소리의 발생 유무에 따라 공간 내 공기의 흐름이 부드러울 수도 있고 휘몰아칠 수도 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부분 약국의 일상은 이렇게 흘러간다. 나는 이 흐름에 자연스레 올라타서 '약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일하기까지 숱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가운을 입고 왼쪽 가슴에는 약사 명찰을 처음 달았던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은 뿌듯함이었다. 자연산 어깨뽕이 들어간 나를 마주하기도 했다. 이 날만을 위해서 그동안 달려왔던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제 약국을 방문하는 환자 한분 한분에게 최선을 다해 약사로서의 임무만 수행하면 되었다. 그런데 웬걸 일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감정은 좌절감이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감기에 걸려서요. 약 좀 주세요."

"아... 잠시만요.. 약사님..!"


 초반에 나는 약사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선배 약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웃픈 상황을 자주 맞이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많이 배웠지만 언제까지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하루빨리 성장해야만 했다. 그런데 약물 지식을 공부하는데도 환자를 대하는 나의 모습은 설익은 바나나처럼 딱딱했다. 물론 일하는 초반에 능숙함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하지만 딱딱한 나의 모습이 부드럽게 숙성되려면 무엇인가 더 필요했다.






 환자를 대하는 약사의 이상적인 모습은 밝은 미소와 함께 상냥한 말투로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말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초보 약사 시절 내 모습은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퉁명스러운 말투로 환자들의 마음을 등한시하는 거였다. 약대 재학 당시에도 나는 사람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기에 약사로 업을 이어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졸업 전 실습을 통해서 약사로서 나의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 길을 선택했다. 나도 몸이 불편한 입장이기에 약국을 방문하는 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며 가까이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만 하고 표현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은 표정 그리고 몸짓, 눈빛, 말투와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 소통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이 요소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면 좋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교양 있는 사람들의 언어처럼 말꼬리를 올리며 상냥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연말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타보겠다는 배우처럼 연기하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그런 내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나에게 있던 손발이 점점 녹아서 없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적응이 되어 시행착오를 통해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환자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며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자신감도 점점 붙었다. 그렇게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약사의 모습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나에게 맞는 옷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성취감도 느꼈지만 내가 연기하는듯한 모습을 마주할 때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또 내가 응대를 마치고 상대방이 남기고 간 자리에는 왠지 모를 헛헛한 공기가 내 주위를 채우기도 했다. 알맹이는 없고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채워 줄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갈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증을 즉시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약사로 일을 하는데 보이는 부분에만 치중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알기 위한 노력을 했었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봤다. 대답은 '아니오'였다. 즉,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기보단 관심 가지는 척, 공감하는 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족한 나를 보고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분도 있었다. 그분들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붉혔으며 미안함에 저절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자신과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나와 대면하는 몇 분 동안만이라도
상대방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짓게 하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나의 내면에서 약국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소소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첫 만남에 상대방에게 건네는 인사부터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근황 토크를 하며 그분들과 일상을 나눴다. 비록 몇 분이라는 짧은 순간이지만 나를 거쳐간 이들의 미소가 비어있던 내 마음을 조금씩 채우며 충만하게 해 주었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 나의 해방 일지 中 -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지쳐 보이는 상대방을 향해 여자 주인공이 한 대사다. 우리 삶의 작은 조각들을 어떤 생각으로 채우며 나아갈 건지는 순간의 선택에 달렸다. 어두움이 있기에 밝음이 더 빛나게 느껴지듯이 어렵게 가는 듯한 하루 속에서 마주한 찰나의 기쁨은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공유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모두를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생각을 현실 속에서 꼭 이루어 나가리라 자신과 약속하며 한 발자국씩 전진할 것이다.     


물론 이 약속을 지키기 힘든 경우도 있을 테지만 이것을 일상에서 지키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것이다.


나는 藥學과 동시에 約(맺을 약)學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약사이자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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