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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Aug 26. 2021

소설 <아몬드>의 실사판 할머니

베스트 셀러 소설인 <아몬드>의 주인공은 열여섯살 소년인 윤재이다. 그는 ‘아몬드’와 같은 모양인 우리 뇌의 측두엽 깊은 곳에 위치한 편도체가 작아서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를 ‘괴물’이라 칭한다. 윤재가 진짜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따뜻한 소설이다.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는 편도체가 작은 소년이다. 

공교롭게도 레지던트로 일하는 동안 윤재와 비슷한 환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매우 작은 체구를 가진 60대 후반의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여러 번 간질 발작을 경험할 정도로 간질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50대 후반에 편도체 절제술을 받은 환자였다. 편도체가 없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편도체가 손상될 경우 다른 사람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향성은 있다고 한다 (1). 반면에 편도체를 절제한 환자에게서 오히려 과도한 공감 능력 (hyper empathy)이 관찰되는 경우도 있었다(2)고 하니, 공감이라든가, 감정을 인지하는 과정이 편도체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매우 복잡한 뇌의 기전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6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또 천진난만한 환자였다. 노년의 환자분께 이런 설명을 드리기에 약간 죄송하기도 하지만 ‘귀엽다’라는 표현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그녀였다. 편도체 절제술을 받은 이후 그녀를 수십년간 지독하게도 괴롭혀왔던 간질 증상은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편도체가 사라진 후로 달라진 점은 (예상할 수 있듯이) ‘겁을 상실한 점’이라고 그녀는 말하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맨하탄의 한 호화 콘도 앞에 차를 잠시 세우고 있었다. 이내 건물에서 나온 콘도의 도어맨이 창문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서 올려다 본 도어맨의 몸은 그녀에게는 큰 산과 같았다고 한다. 엄청난 거구의 도어맨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험한 말투로 차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눅들지 않았고 오히려 지팡이로 그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다 대고 욕이야!” 


그녀는 그 직후 도어맨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신기한 점은 그녀는 그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덕분에 응급실 신세를 져야만 했고 눈두덩이에 커다란 멍을 지닌 채로 한동안 지내야만 했다. 이 외에도 그녀는 편도체를 절제한 후로, 자주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되곤 했다. 


이렇게 그녀의 인생은 수술 전과 후로 매우 달라졌지만 그녀는 수술 후의 자신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단순히 간질이 사라짐으로 인해 삶의 질이 높아진 것 외에도 ‘겁을 모르는’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편도체를 절제하기 전의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데에는 100퍼센트 동의했다. 공포심을 느낄 수 없게 된 그녀의 성향과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솔직 했고 동시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생의 후반전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에 대해 감사했다. 공포심이 없어지자 예전에는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뒤늦게나마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배우 오달수가 연기했던 호텔 사장은 ‘인간은 상상을 해서 비겁해지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상상을 하지 않으면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를 보며 문득 그 대사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 만남에서도 그녀는 쿨했다.  


“남들은 정신과 의사들이랑 헤어지는 걸 무서워하더라구요. 난 안 무서워 할래요. 왜냐하면 난 겁을 모르는 여자니까요.” 


그녀는 웃으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참고문헌

(1) Adolphs, R., Tranel, D., & Damasio, H. (2001). Emotion recognition from faces and prosody following temporal lobectomy. Neuropsychology, 15(3), 396–404.

(2) Richard-Mornas, A., Mazzietti, A., Koenig, O., Borg, C., Convers, P., Thomas-Anterion, C. (2014). Emergence of hyper empathy after right amygdalohippocampectomy. Neurocase, 20(6), 666-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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