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Sep 30. 2021

아픔이 길이 될 수 있을까?

트라우마 후의 성장에 대하여

정신 의학은 기본적으로 정신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현상을 바라볼 때 질병중심적으로 접근한다. 정신 의학의 진단 기준인 DSM-5에서 대부분의 진단명을 'disorder(장애)'라는 명칭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을 잘 반영한다.


트라우마 또한 마찬가지이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용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PTSD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 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증상들 - 트라우마를 일상 중에, 혹은 꿈을 통해 재경험하고, 트라우마를 떠올릴만한 행동, 장소, 사고를 회피하며, 이에 따른 과도한 경각심, 부정적인 정서 (우울, 불안 등등)를 경험하는 것-을 보이는 질병을 의미한다.


PTSD가 트라우마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질병이라면, 이의 반대급부로 트라우마 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개념이 있다. 비교적 최근 연구가 시작된 ‘트라우마 후의 성장’이란, 말 그대로 트라우마를 겪은 후 개개인이 겪는 의미 있고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들을 의미한다. 가령,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


1) 스스로 몰랐던 자신의 내적 힘을 깨닫게 된다든가(힘든 일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다는 깨달음),

2) 삶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나만의 가치에 대한 감사를 느낌),

3)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인생의 새로운 진로를 설계),

4) 종교적 신념의 변화(신앙심의 변화),

5)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정립(친밀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 감수성의 증가) 하는 등의 과정을 포함한다.


트라우마 후의 성장은 트라우마를 겪은 후 다시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또한, 추후 다시 경험할 수도 있는 미래의 트라우마를 더 잘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것으로 밝혀졌다(2).


나 또한 정신과 의사로서 트라우마를 접할 때면 늘 PTSD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최근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면서 트라우마 후의 성장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PTSD의 주요 증상 중 하나는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기억, 감정, 사고, 외적인 자극 등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피는 일시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시킬 수는 있으나, PTSD를 지속시키며, 결국 장기적으로 더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효과적인 트라우마 치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부분은 환자가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트라우마 치료기법들이 트라우마 후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이다(3).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성장할 수 있을까? (출처: 게티 이미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트라우마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4,5). 하지만 트라우마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떠나, 이를 통한 성장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우리는 이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코로나 바이러스 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타인의 고통에 보다 민감하게 공감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성장의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   


* 이 글의 제목은 제가 존경하는 김승섭 교수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대한 오마주 임을 밝힙니다.


참고 문헌

(1) Tsai, J., El-Gabalawy, R., Sledge, W.H., Southwick, S.M., Pietrzak, R.H.(2015) Post-traumatic growth among veterans in the USA: results from the national health and resilience in veterans study. Psychol Med, 45: 165-179.

(2) Tsai, J., Mota, N.P., Southwick, S.M., Pietrzak, R.H. (2016)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a national study of U.S. military veterans. J Affect Disord, 189: 269-271

(3) Roepke, A.M. (2015) Psychosocial interventions and posttraumatic growth: a meta-analysis.

J Consult Clin Psychol, 83: 129-142

(4) Bridgland, V.M.E., Moeck, E.K., Green, D.M., Swain, T.L., Nayda, D.M., Matson, L.A., et al. (2021) Why the COVID-19 pandemic is a traumatic stressor. PLoS ONE, 16(1): e0240146.

(5) Norrholm, S.D., Zalta, A., Zoellner, L., Powers, A., Tull, M.T., Reist, C., Schnurr, P.P., Weathers, F., Friedman, M.J. (2021) Does COVID-19 count?: Defining Criterion A trauma for diagnosing PTSD during a global crisis. Depress Anxiety. 38(9):882-885.


매거진의 이전글 외로움이라는 전염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