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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13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그것을 병행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표의 기능을 특징짓기 위해, (언어의) 술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것을 집합화하기 위해, 우리에겐 내가 출발한 지점, 포트로열(Port-Royal)의 논리가 있습니다. 르카나티(Recanati)가 일전에 여러분께 '명사화된 형용사(adjectif substantivé)'를 언급했었죠. Rondeur(역자 주 : 둥근 형체, 혹은 비유적으로 솔직한 태도를 가리킴)는 rond(역자 주 : 둥글다는 의미의 형용사)에서 유래되었고, 그렇다면 juste(정당하다는 뜻의 형용사)로부터 justice(정의라는 뜻의 명사) 등은 안 될 게 있나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바처럼, 의미론적 범주가 아니라 기표를 집합화하는 세계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의 어리석음을 진전시킬 수 있게 해 줍니다.


안 될게 뭐 있나요? 기표는 원래 어리석습니다.


내겐 어떤 미소, 어리석은 미소가 생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가 알듯이 어리석은 미소는 - 성당에 가보십시오 - 천사의 미소입니다. 이것이 파스칼주의자의 비판에 대한 유일한 정당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렇게 어리석은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최고의 기표 속에서 헤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 건조한 것만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 천사가 더 이상 웃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천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나는 천사를 불가분의 관계로, 심지어는 무한히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들이 동일한 메시지를 가져온다고 믿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천사의 실제 모습입니다.


왜 우리는 기표의 기능을 그토록 강조합니까? 왜냐하면 분석담화만이 우리를 고립시킬 수 있는 상징계 차원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께 사람들이 나에게 분석을 어떻게 요청하는지 알려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이 냉기를 만지고 싶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신께서 그들이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상상하는지 깨달을지도 모르죠. 아마도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바보라 여긴다고 믿을 겁니다. 그런 경우에 나에게 떠오를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은 이겁니다 : 문제는 분석 담화가 기표를 행사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명사화된 형용사인 어리석음을 도입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야말로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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