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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6

본 연재물은 저자가 프랑스어와 정신분석을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에 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오역 가득한 번역본으로 해석에 적잖은 혼란을 줄 여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참고문헌으로 삼기보다는 단순 참고자료로 봐주세요. 오역에 관한 지적은 항상 환영합니다.


성적 주이상스의 공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며 콤팩트성을 충족합니다. 여성의 성적 존재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체가 아닌 언어에 내재한 논리적 욕망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언어가 실존한다는 사실, 그리고 불안한 신체의 외부에 성적인 존재처럼 대타자가 실현되었다는 사실, 이들에 내재된 일관성과 논리는 상기 언급한 '하나씩(une par une)'를 요구합니다.


이는 참으로 기이하고 매혹적인데 다음과 같이도 말해볼 수 있습니다 : 이 일자의 요구는 파르메니데스가 우리에게 예고한 바처럼 대타자로에 기인합니다. 존재가 있는 곳, 이것이 무한성의 요구입니다.


나는 이 대타자의 장소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 돌아오겠습니다. 이미지를 그려드리기 위해 이를 묘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분석가들이 돈 후안을 통해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취했는지 압니다. 분석가들은 돈 후안으로부터, 모욕적인 것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동성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들께 상기시켜 드린 이미지에 집중하십시오. 열린 집합에 의해 뒤덮인 성적 주이상스의 장소는 어떤 한계를 구성하며 우리가 마침내 셀 수 있게 됩니다. 이 여성적 신화의 핵심에 돈 후안이 그것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점이 보이지 않나요?


이것이 다른 성, 곧 (여성에 대한) 남성입니다. 이 점에서 돈 후안의 이미지는 중요합니다.


이름들이 있는 여성들, 우리는 이들을 목록화하고 셈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천 개의 존재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씩(une par une) 셀 수 있다는 것은 지당하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보편적 일치의 일자와 완전히 다릅니다. 만약 여성이 '전부가 아닌 것(pas-toute)'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 신체 내에서 성적인 존재와 같이 '전부가 아닌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도출할 수 없습니다.


4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들은 여러분이 분석에서 출구를 찾는 담화의 그것과 같습니다. 근데 무엇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건가요? 바로 다른 담화들의 고장(lâchage)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분석 담화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격차, 즉 자신의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동일한 심급이나 동일한 담화의 지배를 받지 않고서 다른 더 순수한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위상학을 검토할 수 없습니다. 위상학은 담론의 발생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이 위상학이 우리의 경험과 더불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 이는 내가 이전에 제시한 바대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스스로 사라지는 것(s'oupire)을 정당화하는, 결코 어떤 실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존재에도 연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닌가요? 그리고 철학과 같은 수단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에 반대하는 무엇이 아닌가요?


"가정된 존재"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술어를 거부하고 (예컨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고도 '사람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에 관한 것은 술어의 이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막다른 골목으로 우회하는 것, 어떤 술어로도 충분하지 않은 논리적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것 외에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그것, 스스로를 절대적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그것은 '성적 존재'가 주이상스에 관심을 갖는 한 '성적 존재'의 형식의 파괴, 단층, 방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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