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구자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늘 시간에 쫓기고 바쁜 사람이 있다.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쉽게 말해 ‘일중독’이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워커홀릭(Workaholic)이랄까?
40대 중견기업 부장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주말에도 회의를 소집하여 부하 직원들을 힘들게 한다.
당연히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주말여행을 가는 것은 먼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물론 업무성과가 좋다고 인정받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허무한 마음이 들어서 병원을 찾게 되었다.
이 남성은 왜 일에 푹 빠진 걸까?
원래는 직장에서 빨리 승진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동기들보다 빨리 대리로 승진하니 월급도 늘고 대우도 좋았다. 소위 ‘일할 맛이 난다’고 할까? 일할 맛이 나니까 더 열심히 일했고 또 성과가 좋아서 빨리 과장으로 승진했다.
행동심리학적으로 볼 때 ‘정적 강화’라고 해서 좋은 것이 꼬리를 물고 연속해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계속 ‘정적 강화’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에 푹 빠져 살다보니 오히려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았다고 한다. ‘정적 강화’에 반대되는 ‘부적 강화’가 일어난 것인데, 일에 빠져 사니까 오히려 가정대소사를 포함한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가정주부인 60대 중년 여성은 손녀를 돌본다고 바쁘다.
딸이 도우미를 부르라고 돈을 드려도 직접 하는 게 속편하다고 애써 외면한다.
문제는 지금도 힘들게 손녀까지 돌봐주면서, 할머니, 시어머니 역할까지 너무 완벽하게 한다는 점이다.
며느리도 직장을 다녀서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가정 살림을 포함한 손녀 양육도 혼자 도맡아 하고 있었다.
자기희생적이라는 표현은 너무 고상하고, 쉽게 말해서 너무 심하게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물론 본인도 자신이 처한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가끔 울화통이 치민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생활을 스스로도 못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부모님들은 맞벌이하는 자식들과 그 손자 손녀들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분들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너무 과도한 역할을 책임지다보니 홧병, 우울증이 쉽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런 다양한 역할을 통해서 스스로의 자존감, 존재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집안 살림도 엉망이 되고 손녀도 돌볼 사람이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면서, ‘내가 나이는 먹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고 있다.
이런 분에게 ‘힘에 부대끼면 도우미 도움을 받아라’, ‘힘들면 며느리에게 못 하겠다고 말해라’고 조언하면, ‘남(도우미)을 어떻게 집에 들이냐!’, ‘애들도 아직 돈을 더 모아야 하는데...’라고 하면서, 본인이 여전히 고생해야 됨을 정당화시킨다.
우리나라가 1970~8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근면’과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중독’이라는 모습을 사회적으로 미화시키고 오히려 칭찬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철두철미’, ‘완벽주의’를 강조한 우리사회의 결과물이자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명성을 쌓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이 전부’가 되고 ‘나와 가족의 행복’은 소외된다면 이것 또한 분명 큰 문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조언과 처방을 드리고 싶다. 내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열심히 해보자. 고혈압이 생기고 만성 두통, 소화불량, 만성피로감 등이 생긴다면, 미련없이 하던 일을 멈추기 바란다. 지금 당장 성공하지 않더라도 차후에 다시 노력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심리적 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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