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을 떠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행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쿠키영상처럼 파리와 드골공항의 여행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시는 모두 처음으로 가본 곳이었지만 귀국 전 마지막으로 들른 프랑스 파리는 과거에 두 번 들렀던 적이 있는 도시였다.
2023년 파리에서 레이오버 여행을 하다.
이번에 파리에서 환승을 선택한 이유는 아시아나 비즈니스 스마티움을 타기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파리 레이오버 여행에 대한 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의 생라자르역(Gare Saint-Lazare)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고 시간이 가능하다면 에펠탑이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도 마시고 싶었다.
환승 노선은 오를리 공항(Aéroport de Paris-Orly)에 11시 45분에 도착해서 드골 공항(Aéroport de Pari-Charles de Caulle)을 19시 정각에 출발하는 것으로 파리에서는 7시간 1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오를리 공항에서 샤를드골 공항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리고 샤를드골 국제공항은 출국심사를 감안하면 늦어도 2시간 반 전에는 도착해야 했다. 이렇게 4시간을 빼면 실제로 파리를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리스본에서 오를리 노선은 EU국가 이내이고 샤를드골에서 인천노선은 EU국가를 벗어나는 것이라 수화물연계도 되지 않았다. 오를리 공항에서 모든 짐을 찾아서 직접 이동한 후에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 다시 부쳐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리 레이오버 여행을 꼭 하고 싶었다.
1999년 런던에서 한 달 살이를 하다.
'한 달 살기'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인 1999년 런던에서 한 달을 머무른 적이 있다. 너무 높은 물가에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주변에는 "왜 하필 비싼 런던이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런던이기 때문에" 꼭 한 달을 살아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숙소공유 웹사이트도 없던 시절이라 런던에 온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카페의 게시판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방을 찾았다. 인터넷 카페의 게시판이 아니라 책과 작은 소품 등을 커피와 함께 팔던 실제 카페의 벽에는 아르바이트와 민박 등 각종 정보를 붙이는 게시판이 있었다. 지금처럼 한 달 살기 숙소를 미리 정하고 런던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런던에 가서 카페를 가야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호텔이나 민박은 요금을 지불하면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지만 나는 영국인의 집에서 방을 빌려서 살기를 원했다.
운이 좋게 한 달간 방을 세놓는다는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지도앱도 없던 시절이라 지도책에서 주소를 찾아보았다. Zone3에 해당해서 중심지에서는 조금 거리가 멀었지만 지하철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의 주택가였다. 방 하나에 당시 환율로 한화 75만 원에 달하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일단 전화를 걸었다. 영국인 할아버지의 집인데 방학 동안 고향으로 돌아간 홍콩 유학생이 사용하던 방을 딱 한 달만 세놓는 것이었다. 욕실과 주방 등 나머지 공간은 공동으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방을 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나에게 딱 맞는 조건이었다. 그 집에서 내가 원하던 런던 한 달 살기를 했었다.
오전에는 영어 학원에 등록해서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자유롭게 여행을 했다. 집세 이외의 비용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직접 찾아간 영어 학원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3시간 한 달 수업료가 15만 원 정도로 한국의 유학원을 통하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용이 적게 들었다. 점심은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나갔다. 런던의 비싼 물가와는 달리 테스코(TESCO)에서 한국보다 낮은 가격으로 식빵을 살 수 있었다. 오후에는 영국 박물관(The British Museum),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테이트 현대 미술관(Tate Modern)등 무료 전시회를 주로 다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 낮시간에 마티니 할인으로 뮤지컬을 관람했다.
1999년 런던과 2023년 파리는 모네의 생라자르역으로 나에게 연결되었다.
영국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는 일주일 동안 매일 가도 새로운 전시물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일주일 후부터는 주로 내셔널 갤러리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 몇 작품을 한 시간씩 바라보곤 했다. 당시 가장 자주 보았던 작품 중에서 하나가 모네(Claude Monet)의 생라자르역(The Gare Saint-Lazare)이었다. 증기를 뿜고 있는 기차가 서있는 오래된 역의 모습이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나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복학을 하고 학점을 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 후 취직을 하고 바쁘게 일하면서 런던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파리에서 3시간 내에 생라자르역을 보기 위해 사전에 계획을 세우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이 필요한 알람브라궁전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생라자르역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사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24년 전과 달리 집에서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블로그에는 파리의 지하철 노선, 티켓의 종류 등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이 많았다. 오를리 공항에서 북역(Gare du Nord)으로 가서 짐들을 맡기고 생라자르역에 다녀와서 침을 찾은 후 샤를드골 공항으로 가는 노선으로 정했다. 샤를드골 공항은 Zone5에 해당하기 때문에 Zone5 모빌리스(Mobilis) 1일 교통권을 구매하면 하루 동안 파리 전체에서 환승이 가능하다고 했다.
3시간이면 생라자르 역을 보고 북역이나 생라자르 역 주변의 노천카페에도 갈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카페에서 에펠탑은 볼 수 없더라도 말이다.
생라자르 역을 보는 것은 계획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오를리 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모빌리스(Mobilis) 티켓을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를리 공항의 키오스크에서 판매하는 모빌리스 티켓은 Zone4가 최대였다. 블로그에서 말했던 Zone 5 모빌리스 티켓을 판매하는 곳은 없었다. 여행 안내소(Tour Information)에 가서 물어보니 모빌리스 티켓이 아니라 샤를드골로 가는 1회권 티켓 또는 Zone5까지 사용할 수 있는 파리 비지트 1일권(PARIS VISITE Zone1-5 1 jour)을 사라고 했다. 파리 비지트는 하루 동안은 여러 가지 교통수단을 탈 수 있고 여행지 할인이나 무료입장을 포함하고 있어서 가격이 조금 더 높았다. 생라자르역을 가기 위해서 여러 번 타고 내려야 하는 나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안내소에서 파리 비지트를 팔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키오스크로 가서 줄을 섰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교통권을 구매하는 키오스크와 여행 안내소에 길게 줄을 서있었다. 키오스크, 안내소, 키오스크를 반복해서 줄을 서는 바람에 PARIS VISTE 티켓을 구매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파리 비지트 표로 거의 대부분 교통수단 탑승이 가능했기 때문에 파리 북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인 Orlyval을 타고 Antony역에서 PER B노선으로 갈아타고 파리 북역으로 갔다.
내가 참고한 블로그 들에서는 북역에서 짐을 맡기는 곳은 케리어 표시가 있는 표지판을 찾아서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시작점이 유로스타나 TGV와 같은 고속열차를 타고 내리는 곳이라는 것을 몰랐다. PER라인을 타는 곳은 짐을 맡기는 곳보다 더 아래에 있었다. 다시 1층으로 올라가야 짐을 맡기는 곳으로 내려가는 표시를 찾을 수 있었다. 짐을 맡기고 나니 내게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정도였다.
노천카페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하고 북역에서 가장 빠르게 생라자르 역으로 갈 수 있는 PER-E라인을 타러 갔다. 구글 지도를 보면 PER-E를 타는 곳이 북역 밖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 역사 밖으로 나갔다. PER-E라인 표시를 보고 북역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PER-E라인은 북역 지하에서 PER-B라인처럼 탈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는 것과 동일했다. 계속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샤를드골 공항도 복잡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서 생라자르 역을 다녀와야만 했다.
24년 만에 그림 속의 생라자르역을 직접 만나다.
드디어 PER-E라인을 타고 생라자르역 지하에 도착을 했다. 이제 북역처럼 1층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림 속에 있던 역을 실제로 바라볼 수 있었다.
1층으로 올라갔더니 생라자르역은 북역과는 달리 표가 없으면 플랫폼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북역은 1층에 개찰구가 따로 없어서 그냥 들어오는 열차들과 플랫폼을 볼 수가 있었다. 생라자르역은 1층에 개찰구가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개찰구의 높이가 허리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키 높이여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24년 만에 도착한 생라자르 역의 플랫폼을 바로 앞에 두고도 제대로 볼 수가 었었다.
그때 파리 비지트(PARIS VISITE) 표가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찰구에 대어보았다. 그런데 개찰구가 열렸다. 드디어 내 눈으로 생라자르역을 볼 수 있었다. 관광지 무료입장이나 할인을 한 번도 받을 수 없어도 파리 비지트 표를 구매했던 것이 너무 다행이라고 느꼈다.
열차를 타고 내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생라자르 역의 사진을 찍었다. 충분히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다시 나의 눈에 생라자르 역을 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는 없었다. 현대식 TGV 뒤로 오래된 지붕과 그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 그리고 플랫폼이 보였다. 북역보다 훨씬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생라자르역이 고마웠다.
도착하는 동안의 고생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생라자르 역은 나에게 23년간의 기다림을 만족시켜 주는 모습으로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나는 199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네의 그림으로 보던 생라자르역을 2023년 파리에서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 파리 오를리 공항의 교통카드 구입 안내 (2023년 11월 기준) 』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는 목적지와 용도에 따라서 다양한 교통카드를 구입할 수 있다. 'OrlyBus'라고 적혀있는 붉은색 키오스크보다 'Tickets Paris'라고 적혀있는 푸른색 키오스크에서 더 많은 종류의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1】Orlyval을 타러 가다 보면 보이는 붉은색 키오스크
【2】가지고 있는 Navigo Pass에 충전을 원하면 왼쪽, 표 구입을 원하면 오른쪽을 선택
【3】오를리 버스표, 파리 비지트, 모빌리스 Zone 1~4 중 구입을 원하는 것을 선택
【4】일반과 어린이(할인) 중 선택
【5】(파리 비지트를 선택한 경우) 이용 일을 선택
【6】(파리 비지트 1-day를 선택한 경우) 몇 장을 구입하는지 선택
【7】지금까지 선택한 항목을 확인
【8】카드나 현금(지폐, 동전)을 투입
【9】종이로 된 파리 비지트 1일권과 잔액 동전이 나옴.
파리 비지트 1일권(1 Jour)은 첫 번째 사용 전에 성(Nom), 이름(Prénom), 사용 날자(Le)를 기입해야 한다. 해당 날자의 24시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2일권(2 Jour) 이상은 성과 이름은 동일하며 언제부터(Du) 언제까지(Au) 사용인지를 적어야 한다. 갑자기 표를 검사할 때 기입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부정 승차로 벌금을 낼 수도 있다. 실제로 파리 북역에서 PER을 내렸을 때 개찰구 앞에서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표를 보여달라고 한 적이 있다.
【1】비행기에 내려서 위탁수화물을 찾아서 나오는 곳 앞의 푸른색 키오스크
【2】(가운데 아래의 은색 부분을 돌려서 항목을 이동하고 오른쪽 초록색 버튼으로 선택) 가지고 있는 Navigo Pass에 충전을 원하면 위쪽, 표 구입을 원하면 아래쪽을 선택
【3】더 많은 종류의 표를 구입 가능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표도 있음)
【4-1】(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표를 선택한 경우) 몇 장을 구입하는지 선택 (드골 공항까지 표 한 장의 가격은 24.60유로)
【4-2】(파리 비지트 표를 선택한 경우) 이용 일을 선택
【5】(파리 비지트를 선택한 경우) 금액을 확인하고 카드나 현금으로 구매 (파리 비지트 1일권 한 장의 가격은 28.50유로)
파리 비지트 1일권은 드골 공항까지 가는 표보다 3.9유로가 비싸다. 드골공항으로 바로 가서 비행기를 환승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다녀오기 위해서 지하철을 두 번만 이용한다면 파리 비지트가 더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