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의 이해’ 첫 회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은행원 하상수 계장(유연석 연기)이 사내 동아리 활동으로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고 있는데, 지점에서 급하게 전화가 걸려온다. 어느 회사의 대출 관련 문의인 듯하다.
보증재단은 심사는 빨리 진행되는데, 한도가 적습니다... 반면, 보증기금은 심사가 까다로운 편이고, 시간이 좀 걸리는데, 한도는 충분할 겁니다....
입행 3년 차에 불과한데도 지점의 에이스 직원으로 인정받은 하상수 계장의 자신감 넘치는 응답이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지역신용) 보증재단*이나 (신용) 보증기금**은 은행에서 기업체에 운영자금 또는 시설자금 대출을 실행할 때 담보(대출보증서)를 제공해 주는 공적 기금이다.
* 보증재단은 각 지방자치단체의 출연자금, ** 보증기금은 정부와 은행의 출연자금을 기본재산으로 하여 각각 영세/자영업자, 중소/벤처기업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한 후 신용보증을 제공한다.
기업이 자금이 필요해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 은행은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실시한다. 담보 없이 신용대출을 취급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한도금액이 적거나,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금액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기업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신용대출 취급 후 대출이 부실화되면, 은행의 원금 회수 가능성이 낮아지고, 이는 은행의 건전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대출을 취급한 임직원이 갖는 책임감도 크다. 따라서, 기업 대출은 상당 부분 기업의 보유자산인 부동산, 예·적금, 동산(기계기구) 등을 담보로 잡거나,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신용보증재단·무역보험공사 등 공적 기금의 보증서/보험증권을 담보로 실행된다. 금융기관(은행)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드라마 속 하상수 계장의 통화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돌우물이 규모나 매출 면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었는데, 임 대표가 연락을 해오자, 성장통을 겪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 운영자금이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회사가 성장한다는 건, 매출이 늘어나서 돈을 많이 번다는 뜻인데 왜 자금이 부족하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카드와 현금을 주로 사용하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소매업)의 경우는 그 생각이 맞다. 판매금액(매출액)이 바로 현금화(계좌 입금)되고, 이 자금으로 원재료나 원자재를 구매(매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이클이 지속되면, 회사의 규모(매출, 자산)는 성장하고, 현금흐름도 양호해지며, 자금유동성에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한, 판매가 부진하면, 매입량을 줄이면 되기 때문에 갑작스레 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유통업(도매업), 건설업 등 대부분 업종의 경우 그렇지 않다. 회사가 물건이나 상품, 서비스(용역)를 판매하더라도, 판매대금이나 (서비스) 수수료가 일정 기간(통상적으로 30~45일) 지난 후에 정산되기 때문이다. 흔한 표현으로는, 세금계산서 마감 후 익월 15일 또는 30일 결제, 뭐 이런 식이다. 건설업, 의약품 도매업 등 일부 업종은 업계 특성상 60일, 90일, 심지어 120일 이상 결제 기간이 걸리기도 한다. 외상매출금(매출채권)이 발생한 후 실제 수금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공백기. 이게 기업 자금난의 주원인이다.
그 공백기에도임직원의 급여, 원재료 매입대금, 사무실 임차료, 각종 공과금 및 경상비용은 지급되어야 한다. 기존에 보유 중인 자금이 충분하다면 괜찮지만, 대부분은 매출 규모에 비례해 자금을 집행하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이 여유로운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만에 하나 주요 판매처에서 제때 입금을 해 주지 않는 경우는 문제가 커진다*. 월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국세/지방세 또는 각종 공과금을 체납하거나, 대출원금 또는 이자 비용을 지급하지 못하면, 말 그대로, 흑자 부도가 날 수도 있다.
*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운영 중인 매출채권보험에 가입하면, 판매처(구매처)의 부도나 폐업, 회생, 이행지체로 회수하지 못한 외상매출금을 보상(보험금 수령) 받을 수 있다.
돌우물도 그러했다. 회사의 매출이 성장하자, 직원 수가 늘었고, 이에 따라 사무공간도 더 필요해졌다. R & D 센터와 원재료 보관 창고, 냉동 냉장 설비도 추가했다. 긴축재정으로 영업 마케팅 비용을 줄인다 해도, 규모의 성장에 따른 각종 경비 및 판매관리비 등 돈 나갈 곳은 늘기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돌우물이 직영 매장 수가 많지 않고, 사업 경쟁력이 FNB (가맹) 브랜딩 홍보에 있기에 다른 회사들보다 매출원가가 현저히 낮다는 점이었다. 가맹점 수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새로운 메뉴와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개발·홍보하는 한, 급격하게 유동성 위기를 겪을 확률은 낮았다.
사업을 시작한 이래 여태껏 자기자본금과 영업 수익금으로 회사를 운영해 온 덕에 아직 은행 대출금이나 투자금 등 타인자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대처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돌우물은 가맹점에 납품되는 음식 원재료나 가공식품을 직접 매출액으로 계산하지 않고, 대기업(SPC사)에 매입-매출 관련된 물류(유통)를 대부분 위임하고, 매월 1회씩 SPC로부터 정산받는 물류 수수료를 매출로 계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매월 정상적으로 입금되던 수수료 매출이 저간의 사정으로 한 달 정도 입금이 연기되는 바람에 일시적인 자금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대기업 물류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대기업과 직접 거래한다는 측면에서 대내외적 이점이 많긴 하지만, 가끔은 통제하기 힘든 협상력의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회사의 규모(자산이나 매출액)가 중요한 것인지, 영업이익률과 같은 실속 있는 운영이 더 중요한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이는, 최고경영자 스타일의 영역이다. 임 대표는 실속파 CEO라 할 수 있다. 다만, 금융기관(은행, 보증기관)은 기업의 운전자금 대출(한도) 금액을 결정할 때 매출액, 총자산과 같은 외형 규모를 중시한다. 시쳇말로, 캐파(Capacity)가 커야 대출가능액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돌우물은 사업초기에는 물류 수수료를 주요 매출액으로 계상하고 있었기에 회사의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매출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돌우물은 법인소유 부동산이나 예적금, 대표이사 소유의 개인재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신용대출을 받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보증기관의 보증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운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무차입 경영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레버리지(지렛대)가 필요하다.타인(은행 등)의 자금을 지렛대로 활용해서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영업 수익금으로 매월 발생하는 금융비용을 커버할 수 있게 되면, 차입금은 회사의 성장과 안정적 운영에 도움이 된다. 기업의 규모와 가치가 증가하면, 차입금 상환능력도 향상된다. 기업이 차입금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부도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겠지만, 큰 규모의 시설투자나 연구개발이 어려워져 지속적인 경쟁력 유지나 규모의 성장을 꾀하기는 어렵다.
기업의 총자산은 자본금과 부채로 구성되고, 차입금은 부채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조금 과장하면, 적정 수준의 차입금은 기업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참고) 일반적으로 기업 운전자금 대출은 1년 만기로 운영된다. 하지만, 1년 후 만기가 도래되었다고 전액 상환을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업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대부분 만기 연장이 되고, 최대 10년까지 대출 연장이 가능하다. 물론, 기업은 대출금액 중 일정 금액 이상이 매년 상환될 수 있도록 자금 스케줄 관리를 해야 한다.
요즘은, 레버리지가 한 개인이 주택(아파트, 빌라)이나, 건물, 상가 등을 구입할 때 금융회사로부터 조달하는 (최대한의) 대출액을 의미하는 재테크 용어로 주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본래 레버리지의 요체는 기업체 운영에 필요한 자금조달에 있다.
돌우물의 어원은 마을의 중심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하고, 휴식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렵다. 돌우물을 에워싼 이해관계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금융회사도 그중 하나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