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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이삭 Aug 03. 2023

공무원은 정치인의 장난감

행정은 죽고 정치만 판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조문이다. 누구도 딴지걸 수 없는 이 위대한 조문을 근거로 정치는 그 영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해 왔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 그 시발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시장 군수 구청장을 내 손으로 투표해 뽑는 시대가 열렸다. 시의원 군의원 구의원 등 지방의원도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2010년부터는 교육감까지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치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국가 모든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정치 관련 일자리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지방자치법 전면개정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 의원(시의원 군의원 구의원)들도 보좌관을 채용하여 휘하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월급은 세금으로 나간다. 대한민국은 정치를 통하지 않으면 영향력 있는 공직에 도전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공무원이 근무하는 대부분의 공공기관 기관장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인이나 그 정치인의 입김에 따라 움직이는 준정치인이 90% 이상이다.


공무원은 어디서 근무하든 정치인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직 공무원은 중앙정부 각 부처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행정안전부니 환경부니 국방부니 근무하는 부처의 종류는 매우 많다. 당연히 각 부처 장·차관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장·차관을 임명하는 인사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지방직 공무원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이 통제권과 인사권을 갖는다. 말그대로 절대권력이다.


하지만 밖에서 봤을때나 절대권력이지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정도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이 분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장관이 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정치적 공방과 경쟁을 뚫고 최종 선출이 되고 임명이 되었을까. 아마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그 과정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고 예상은 된다. 수많은 후보자들 가운데서 정당의 공천을 받기까지 엄청난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정당인들과 지역 유지들에게 꾸벅 꾸벅대며 인사를 다녔을 것이고, 알게 모르게 돈도 많이 썼을 것이다. 이들은 그 힘든 전쟁터에서 본인의 우수함과 경쟁력을 어필하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최종 선거에서까지 승리하고 권력의 정점에 선 승리자들이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교육감이 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작용이 있다. 이들은 단기간의 성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정체성은 결국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으로,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장관으로 자신의 정치 커리어를 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끽해봐야 임기는 4~5년이다. 현재 자리에서 업적을 쌓고 국민의 인기를 얻어 더 높은 지위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인은 선거가 끝난 다음날부터 바로 다음 선거만 생각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기초지자체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다음 선거에서는 광역지자체장이나 국회의원이 되길 원한다. 시의원 군의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다음에는 도의원이나 지자체장이 되고 싶어한다. 꼭 더 높은 지위가 아니더라도 다시한번 그 자리에 선출되어 현상유지라도 하고 싶어한다. 권력을 손에 쥐어보면 내려놓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 보장하고 있는 4년의 근무기간동안 어떻게든 자신의 업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무색무취로 가만히 시간만 보내다가는 본인의 미래가 불확실해진다. 우리는 가끔 지방자치단체에서 무리하게 공공조형물이나 테마파크를 만들어 세금만 낭비한다는 언론기사를 접하게 된다. 최근에는 공공조형물뿐만 아니라 케이블카니 출렁다리니 스마트시스템이니 그 분야도 참 다양하게 이것저것 만들고 있다. 이게 다 짧은 시간 내에 뭐라도 해내야 한다는 지자체장의 조급한 마음과 시키는 대로 무조건 시행하는 상명하복 반대의견 없는 공무원들의 합작품이다. 피해는 오롯이 국민 몫이다. 피같은 국민 세금만 줄줄 샌다.


전문성 없는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선출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 부작용이다. 사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내가 사는 동네 시장 군수 구청장 이름도 모른다. 시의원 군의원 구의원 이름은 말할 것도 없다. 지자체장, 기초의회 의원, 교육감 등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관련된 정치인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 국민은 0.1%도 안될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관심이 없다. 대통령이나 여당 야당 대표, 대선 후보 등 언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치인들과 본인이 지지하는 정당의 주요정책 정도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 무관심 속의 정치인들이 선출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공무원은 이 모든 정치인들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장난감이다. 문제는 공무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이 속해 있는 기관장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의회 의원들에게도 협조해야 한다. 여기도 저기도 눈치만 봐야 하는 갑갑한 위치다. 어느 한 사람게만 잘못보여도 큰일이다. 이들 모두가 자신은 국민에게 선출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내가 국민에게 투표로 뽑힌 사람인데, 감히 나에게 공무원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기저에 깔려 있다.


지방자치체가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자리잡은 이후, 기초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이 공무원에게 갑질을 하고 폭언 폭행까지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왕왕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나는 국민들이 선출해준 사람이다. 내가 공무원보다 위에 있다. 공무원은 내 말대로 움직여야 한다라는 잠재의식이 정치인들에게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이러라고 만들어진 제도는 아닌데,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이상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정치인들 완장질만 난무하게 되었다.


정치인은 공무원과는 속해 있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 국가기관의 장이든 지자체장이든 의원이든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속한 정당 안에서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 그래서 공무원은 이들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공무원으로서 내가 어떤 정치인 한명에게라도 잘못 보였다가는 금세 그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내가 모시고 있는 관리자의 평판까지 깎아먹을 수 있다.


따라서 공무원은 정치인 앞에 철저하게 을이 된다.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개최하는 축제나 행사에 가보면 구의원 시의원 주요정당의 지역위원장들이 적게는 한두명,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축사를 하고 인사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다 이런 이유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공무원들도 행사에 참여하는 일반주민들이 이런 형식적인 의전행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공무원보다 절대 갑의 위치에 있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가는 보복을 받게 된다.


공무원도 엄연히 행정 전문성을 갖고 있는 전문직종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특성상 장기간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행정만 하면서 20년 30년 밥벌이한 사람들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한 공무원만큼 그 지역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지역에서만 수십년을 일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 지역에 대해, 행정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성장한 공무원이라 할지라도 큰 의미가 없다. 그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정치인의 뜻대로 모든 행정이 펼쳐진다. 공무원은 정치인의 하수인, 장난감일 뿐이다. 정치인은 공무원의 경험과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무원의 입김에 휘둘리면 정치인으로서 본인이 챙겨야 할 이득을 가져갈 수 없다. 한정된 시간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정치인의 입장과 장기적인 시각에서 그 지역의 발전을 생각하는 공무원의 입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방자치단체장이 수십억 예산을 들여 우리 지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자고 지시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지역에서 수십년 근무한 공무원들은 굳이 이런 조형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조형물이 수십억 돈값을 할 정도로 잘 설계되고 배치될지도 의문이다. 리스크가 너무 큰 사업이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결국 공무원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 경험과 소신에 반하지만 정치인의 뜻에 따라 순순히 복종하고 진급 등 본인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하거나, 강직하게 반대의견을 표하다가 좌천되거나다. 대부분의 공무원은 전자를 선택한다. 그 공무원을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공무원을 본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소모품으로만 여기고 부려먹는데만 급급한 정치인 출신의 기관장들에게 있다. 공무원의 행정 전문성과 장기적 시각을 무시하고 오로지 본인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만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행정은 죽었다. 정치만 있다. 20~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행정인의 의견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국민에게 선출되었다는 그 잘난 정치인들이 모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은 근무기간 내내 그들의 입맛을 맞춰야 한다. 공무원이 꿈을 가질 수 없는 이유다. 아무리 말단 공무원이라도 비전이 있으면 버틸 수 있을텐데 현실은 정치인 장난감이다. 공무원으로서 실력을 쌓아 내가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올라간다면 이런 정책을 펴보리라. 내 경험과 경륜으로 국가를 위해 이런 사업들을 벌여 보리라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행정에서 수십년 경력 쌓아봐야 그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인이 기관장으로 날아와 뻔히 실패할 것이 보이는 아마추어적인 정책을 이것저것 펼치기 시작한다. 그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인의 명령에 공무원은 힘없이 복종할 뿐이다. 내가 수십년간 기획하고 꿈꾸던 정책과 사업도 정치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시행할 수 없다.  국민이 나를 선출했다는 그 엄청난 명분 하나만을 강조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정치인들 앞에 공무원은 오늘도 그저 머리를 숙인다.


평생을 정치인 앞에 을로만 살아야 하는 공무원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강아지는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주인이 100번 바뀌어도 강아지는 항상 새로운 주인을 만난 것처럼 그 주인에게 애교를 피운다. 현재 공무원을 둘러싸고 있는 법과 제도가 공무원을 강아지로 만들었다. 소신도 신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바뀐 주인에게 애교 피우고 충성하는 강아지로 살아야 한다. 


4년마다 한번씩 선거가 치러지기에 그때마다 공무원의 주인은 바뀐다. 전임 기관장에게 충성하고 그 뜻에 열심히 따르다가 바뀐 기관장 앞에서는 전임 기관장이 벌였던 정책과 사업을 정반대로 틀어야 한다. 얼마전 서울시의 ‘I seoul U’라는 도시브랜드가 없어지고 ‘Soul my seoul’로 교체되었다. 도시브랜드의 효용성과 교체에 대한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장이 바뀜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리는 행정의 유약함이다. 'I seoul U'도 기존의 'Hi seoul'을 바꾼 브랜드다. 바꾸고 또 바꾸고다. 로고도 캐릭터도 바뀌고 사업도 정책도 모두 바뀐다.


기관장의 지시를 받아 최선을 다해 도시브랜드를 만들고 사업을 하고 건물을 짓고 하던 공무원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힘이 빠진다. 선거 이후 기관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이 담당하던 업무가 아예 없어지거나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졌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공무원이 느끼는 좌절감은 형언할 수 없다. 근로의욕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내가 지금 열심히 하는 일이 당장 4년 후에 최악의 사업으로 평가되고 비판받을지 모르는데 최선을 다할 사람은 없다. 그저 영혼없이 대충대충 욕먹지 않을 정도로 끝내기에만 급급하기 마련이다.


헌법에 기반해 각종 법령으로 제도화된 구조이기에 공무원의 행정전문성이 무시되고 있는 이러한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법을 만드는 당사자가 정치인인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내용의 법을 만들 리 있겠는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그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사람이 마음껏 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데 공무원이 뭐라고 이러니 저러니 딴지를 걸 수는 없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던가. 공공 분야에서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내 뜻을 자유롭게 펼치고 싶다면 차라리 어느 직업군에서든 자신의 커리어를 훌륭히 쌓고 정당활동 열심히 해서 정치인으로 데뷔하는 것이 더 빠른 길이다. 행정분야에서 정치권력은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공무원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인재들도 정치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못마땅해 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몇년 근무하지 않고 자진퇴직하는 마당이다. 9급 공무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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