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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Jun 09. 2023

나는 지금까지 타인의 시선이 선택과 행동의 기준이었다

타인 시선에서 벗어나는 과정, 자기 사랑 배우기

나는 밴쿠버에서 생활하면서 '자기 사랑'에 대한 부분을 하나씩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자기 사랑'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가치를 알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위해 돌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글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쉬웠던 '자기 사랑'. 이것을 실제로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기 사랑'을 배우면서 나는 내가 어느 하나 내가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해온 적이 없구나 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데 있어서 1순위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였고, 이 부분을 알아차리고 왜 그랬을까? 에 대해 하나씩 고민해 가고 풀어가면서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내 삶의 정답을 찾아갈 수 있었다.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나'로써 살아가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타인에 맞춰 살아가려 하지 말라.

나부터 나를 사랑해주어야 한다.


흔히들 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글로 쓰여 있는 건 누구나 이해가 가능하다. 나도 그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어.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어. 이건 내가 생각해서 내가 내린 결정이야. 난 나를 사랑해.


행복하다 생각했고, 내가 하고 있던 일들이 적성에 맞고 원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나는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원했던 무엇인가 보았을 때 '에이 저건 다른 사람이야기지' 하고 꾹 눌러버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당당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말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이게 행복이 맞아.'라고 나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이전까지 진정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꾹 누르고 참는데 익숙한 나였다.

나는 나의 의견,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 이거 먹고 싶어. 이거하고 싶어. 나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쉽고 간단한 표현 조차 하지 못했다. 우스갯소리로 '선택장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타인이 생각하는 것이 다를까 봐, 내가 타인의 기분을 맞추지 못할까 봐 표현하는 데 있어 항상 조심스러웠다.

내 주변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아닌데? 그래도 넌 너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당당한 사람이었어.라고 말 할지도 모른다. 그런 척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루는 나의 내면아이를 만나보았다. 어릴 적부터 혼자 외롭게 살아왔을 아이.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들고 있는 너의 생각, 기준들 누구를 위한 거니?"


정답을 내기까지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몇 달이 걸린 거 같다. 그리고 조금씩, 하나씩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기준, 엄격한 잣대들은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의 기준이 아니었다. 나의 행복을 위한 기준들이 아니었다. 나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먼저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쁘게 보진 않을까? 욕하진 않을까?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비웃으면 어떡하지?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타인이 이상하게 볼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싫어할 만한 행동, 혹시나 기분 상하게 할 만한 생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의 기준을 하나씩 세워왔다. 나의 모든 기준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야, 그래도 너는 당당한 편이었어. 너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보기에 빛나는 사람들,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그 사람들의 인생의 기준이 나의 방패막이되어 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아왔다. 미디어 매체에 등장하는 유명인, 살아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멋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면 모두가 인정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기준이 나의 기준으로 하나씩 자리 잡았다. 중심에 있고 빛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당당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고 물론, 그들을 나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도 좋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그걸로 안심이 되었다. 그들의 빛나고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들을 바라보며 그게 정답인 줄 알고 살아왔다.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답이 있는 건데,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가이드라인으로 잡아 내 삶의 정답을 내가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삶이 정답이구나라고 결론 내린 후, 나의 정답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삶에서의 정답은 나만이 찾을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답들을 보며 답을 알아내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저게 답이구나! 저게 답이야! 하고 그 기준을 나에게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이젠 나는 미움받지 않겠지, 사랑받겠지. 내가 우러러보는 사람들과 같은 기준 안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안심이 되었다. 내가 혼자 스스로 답을 찾아갈 필요도,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기에 그대로 나는 설명할 수 있었고 그대로 당당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모른 채, 나의 삶의 답이 아닌 타인의 삶의 답들을 내 인생에 하나씩 끼워 맞춰 지금까지 살아왔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다. 유사답이었을 수도 있다. 누가 봐도 정답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기준을 하나씩 만들어온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야, 그건 너의 방식과 맞지 않아.'라고 저 내면 깊은 곳 어디선가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억누르고 무시하며 살아왔고, 들을 필요가 없었다. 외부 타인들도 다 맞다고 말해주었고, 누구 하나 나보고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안심이 되었다. 조금 풀어져도 괜찮다고 조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더 안심이 됐고,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하고 나에 대한 기준은 더 강하게 더 많은 잣대를 세우며 살아왔다.

스스로 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책들, 내가 온전히 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책들을 보았다.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살아가려 노력했고, 또 다른 새로운 방패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답이라 생각했고, 그에 대한 반박할 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찾곤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문제는 나에게 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만의 정답을 찾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 또 다른 유사답을 찾는, 쉬운 방법을 택한 나였다. 이젠 내 삶의 정답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가 변한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 '이건 정답이 아니야'라고 말할까 봐 무서웠고, 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데 힘들어했다.


캐나다에 와 있는 지금 나는 나와의 시간이 많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 메모장과 펜을 들고 다니며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숨어 지내던 내면 아이와 매 순간 대화하며 살아간다.


"지금 들고 있는 너의 생각, 기준들 누구를 위한 거니?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기준들이 없으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


어릴 적부터 나에게 내린 잣대와 기준들로 인해 이미 제약이 많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 기준을 하나하나씩 부숴갈 때마다 이유 모를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도 쌓아온 삶, 하나씩 차곡차곡 이루어온 이 삶들을 놓을 순 없었다. 여전히 나의 내면에서는 갈등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 피해를 주어선 안된다.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 정도의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무시받기 싫다."


평생을 가지고 살아왔던 나의 신념이다. 우리 부모님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배려'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계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해온 일에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무시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이유 모를 '화', '짜증'이 올라오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에도 괜히 혼자 '욱' 하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나 스스로와 대립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데 외부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때, 화가 올라오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을 때, 나는 배로 만족하고 이게 맞는구나 하며 그 신념은 더 단단하게 굳혀져 갔다.


"다른 사람들 기분은 누구 기준인데? 피해를 준다는 건 누구의 기준이고? 인정을 받는 건? 무시는?"


매 순간, 끝없이 파고들며 나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기분, 나의 생각에 대해선 생각해 보려 한적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기분, 생각이 정답이고, 그들이 하는 것에 맞춰가는 게 맞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 발신을 처음에는 잘하지 못했고, 그저 혼자 쓰고 싶은 글을 써 내려갔다. 특히,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굉장히 소심했다. 완전한 '나'를 세상에 알리면, 주변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비웃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모두가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며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1~2 명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되고, SNS가 발달한 현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직접적, 간접적으로 접촉하고 알아갈 수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분과 행동, 기준에 맞추려 했던 나이다. 정작 '나'의 정답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또, 나에게 물어보았다.


"너만을 위한 기준을 만들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원하는 삶을 살면 타인의 기분을 상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의 기준과 기분을 표현하고 전달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인정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타인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어디서 들었을까? "


천천히 하나씩 나의 정답을 찾아갔다. 어릴 적부터 학습되어 온 신념. 그 신념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가 이 부분을 해소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타인의 기준이 정답이라면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에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이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정답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고, 모든 사람의 기준에 맞출 수 없다. 대신 나는 내 삶을 살아가고 있고 나의 삶의 정답은 찾아갈 수 있었다.


삶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는 '저항'도 함께 일어난다. 사람은 '항상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인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나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360도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항상성'이라는 성질을 이용하여 나의 삶, 나의 에너지, 나의 신념이 '나는 내 삶의 창조자이고, 모든 기준은 나에게 있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의 시선에서 먼저 생각하려는 나를 발견할 때, 모든 기준은 '나'에게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다.

과거의 나는 나의 기준을 생각하려 할 때, 그걸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시선에서 생각하는 '나'로 돌아갔다.  오히려 상황이 역전이 된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배우고 는 중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나를 세상에 비추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이젠 내가 원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1순위에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과 나누고 공유하고 행복을 함께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과거의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써 내려갔다. 나 한 사람의 과정이 답이 되어주진 못 한다. '나'를 알아차리는 과정들, 나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나의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전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 사랑'을 배우고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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