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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24. 2021

약 없으면 안 되는 나이

회사원 K의 직장생활 중간정산 (12)

 친구 J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B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은, 생각지도 못한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J가 지인들의 돈을 떼먹고 해외로 도주했다는 데서 끊겼던 안부는 결국 이렇게 새로고침 됐다. 좋지 않은 결말이라 그랬을까. 부고 소식이 나에게까지는 닿지 않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다.


 J는 소위 잘 나가는 금융맨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친구들 중에서 취업도 가장 빨랐다. SNS에는 멋들어진 수트를 빼입고 있거나 해외의 근사한 휴양지에서 양주를 마시는 사진 따위들이 자주 올라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장 친한 고향 친구부터 시작해서 중고교 동창,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 직장 동료들까지 가능한 한 범위의 모든 지인들에게 돈을 빌린 뒤 사라졌다. 대체 그놈의 선물 투자가 뭐길래. 그는 몇 년 간의 해외 도피 생활 끝에 결국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가장 친했던 고향 친구 B를 만나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사과했다고 한다. 그게 J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리가 만 서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J와의 마지막 연락은 몇 년 전 그가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전화를 했을 때였다.


 마침 전셋집을 구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으고 그걸로도 모자라 대출 때문에 은행을 들락날락하던 시기였다. 당장 다음 달 카드 값을 갚기에도 간당간당한 통장 사정 때문에 지금은 어렵다, 미안하게 됐다, 여유가 생기면 몇 십 만원이라도 보내줄게, 라며 전화를 끊었다. 통장 잔고가 넉넉했다면 1~2백만 원 정도는 빌려줬을 텐데. 사정을 몰랐기에 도와주지 못해 못내 미안했다.


 그때 돈을 빌려줬더라면, 그래서 다른 이들처럼 나도 돈을 떼인 '피해자 OO번'이 되었더라면 J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만 남았을까. 그놈 새끼, 잘 죽었다ㅡ 하며 속시원해 했을까. 하지만 미안함에 미움을 더한다 해서 미안한 감정이 묽어지지는 않는다. 요리로 치면, 짜다고 해서 설탕을 한 꼬집 집어넣더라도 싱거워지기는커녕 되려 짠맛과 단맛이 둘 다 겉돌며 남는 것처럼 말이다.


 입 밖으로 다시 꺼내기도 싫었을 일에 대해 이야기해 준 B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잔을 채우고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고 또다시 비웠다. 새벽까지 영업하는 추어탕집에 우리 둘만 남고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옛이야기를 했다. J가 학교 장기자랑에서 나대던 일, 수학여행 때 몰래 마시던 술에 취해서 선생님들께 찾아가서 주사를 부렸던 일, 갓 상경했을 때 즈음 동대문 밀리오레에서 J와 함께 짝퉁 리바이스 501 청바지와 캘빈클라인 검정 티셔츠를 샀던 일, 나와 J 둘이서 2:2 미팅을 나갔는데 상대로 나왔던 02학번 이대 누나들이 별로여서 아직도 이대 여자들이 싫다는 시답잖은 추억담까지 모두 꺼내서 대화의 틈을 메웠다.


 B는 한동안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약과 술과 일에 매달리면서 겨우 그 사건을 잊을 수 있었다며. J에게 빌려줬다 못 받은 자본금 수천 만원을 날렸음에도 다행히 사업은 정상 궤도에 들어섰고, 마침내 나에게도 몇 년 만에 만나자고 먼저 연락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나저나 약을 먹어야 버틸 수 있다니. 우리도 이런 나이가 됐구나 싶었다. 20대까지만 하더라도 건강을 챙기는 약, 대출과 부동산이 주식에 관한 대화, 누군가의 부고 소식 따위는 한참 나중에나 일어날 라고 여겼다. 그런 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나 고민할 문제지 우리 문제는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 친구의 부고를 듣고 검은 양복을 입거나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길 거다. 불현듯 체감하게 된 우리 나이의 무게감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에 마신 술을 죄다 눈으로 쏟아버린 듯 눈물에서 소주 맛이 났다. 친구 돈이나 떼먹고 죽은 놈한테 뭐가 그리 미안하다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별일 없이 살았다. 회사를 다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차를 사고 오래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대출을 받아 집도 샀다. 틈틈이 여행을 다니고 음악을 듣고 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아이를 낳았다. J가 세상에 없더라도 무슨 일 있냐는 듯 살았다. 종종 녀석이 생각나긴 한다. 삶에서 가정법이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J가 결혼했다면 누구와 했을까, 친구들과 부부 동반 모임을 할까, 아이를 낳았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제 눈에만 예쁠 아기 자랑을 지겹도록 매일 단톡방에 올렸을까, 직장에서는 승진을 했을까, 혹은 때려치우고 B와 함께 사업을 하진 않았을까ㅡ 같은 상상을 했다.


 별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서른 중반이 넘어가자 몸에는 별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년 받는 건강검진의 결과서는 어째 페이지가 점점 늘어난다. 소화 능력이 떨어져서 곧잘 체하는 탓에 밥은 조금만 먹는다. 억지로라도 매일 조금씩 걷거나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비타민과 오메가쓰리와 유산균과 루테인 등의 약도 챙겨 먹는다. 몇 해 전엔 결핵에 걸려서 6개월 간 결핵약을 먹었다. 약 때문에 오줌이 주황색으로 나왔다. 누래진 소변기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혼자서 헤죽거렸다. 여하튼 건강을 위해, 아니, 살기 위해서 약을 꼭 먹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도 홍삼 한 포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출근했다.


 며칠 전엔 회사 동기들과 밥을 먹었다.


 최근에 있었던 인사 발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선배는 어떻고, 그 후배는 어떻고, 우리 동기 누구는 어떻게 됐고, 같은 내용의 대화였다. 그러다가 어느 선배의 근황에 대한 대목에서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동안 있었던 부서에서 도저히 적응을 못하다가 종내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까지 먹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결국 이번 인사 발령 때 예전 부서로 돌아가게 됐다고.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다들 뒤이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동안 적막이 흘렀다.


 적막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J형이었다. 너희들한테 처음 말하는 건데. 본인도 요즘 우울증 약 비슷한 걸 먹는다고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려운 단어의 약 이름이 있지만 그냥 알아듣기 쉽게 우울증 약이라 한다고.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수면제에 가까운 약을 처방받았다는 말을 이어갔다. 약을 먹으면 잠도 잘 오고 왠지 기분도 좋아져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왠지 계속 먹어보고 싶단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이어서 K형도 놀랄 만한 고백을 했다. 나도 몇 해 전에 그런 약을 먹었다면서. J형에게 그 약을 계속 먹고 싶다면 자기한테 말하란다.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약들이 있는데 해외 직구로 싸게 몇 박스를 사 둔 게 있다고. 여기가 당근 마켓도 아닌데 갑자기 거래의 장이 벌어졌다. 둘만 서로 알아듣는, 세로토닌이니 뭐니 하는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들을 섞어가며 대화를 하는데 이게 뭔 말인가 싶었다. 그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딱히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해준 게 없다는 사실에 왠지 미안해졌다.


 그동안 동기들 중에서 J형과 K형을 가장 부러워했다. J형은 키도 크고 미남인 데다 일도 잘하고 아들도 무탈하게 잘 키워내서 근심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K형 역시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 짓게 되는 귀여운 두 딸이 있고 회사에서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정책 부서에서 몇 년간 일하기도 했다. 동기들뿐만 아니라 선배들과 후배들도 좋아라 하는 동료였다. 행복한 가장, 좋은 직장인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이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만큼. 그런데 남몰래 고통에 겨워하며 그런 약을 먹고 있었다니.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정말 약이 없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됐다. 바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나이를 먹더라도 약을 너무 많이 먹지는 않았으면, 그리고 병원에 가거나 검은 양복을 꺼내 입는 일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없었으면 한다.



오메가쓰리, 비타민, 유산균 같은 것들은 이제 약이 아니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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