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Oct 26. 2021

아무리 졸려도 커피는 마시지 않겠어요

강릉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8년 4월)

1. 아무리 졸려도 커피는 마시지 않겠어요

강릉 안목해변의 믹스커피 자판기, 커피거리 전설의 시작




 아직 평창 동계올림픽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무렵,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차를 두고 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싶어서였다. 김현철의 노래 '춘천 가는 기차' 때문인지 대학 시절 MT의 추억 때문인지, 왠지 강원도는 꼭 기차를 타고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불가해한 낭만 때문에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강릉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가며 창 밖을 내다 보니 눈이 나렸다. 4월인데 함박눈이라니 강원도는 역시 강원도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에서 내려, 이제는 축제가 끝나버려 왠지 처량해 보이던, 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과 '반다비'와 인사하고 렌터카에 올라탔다.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목 해변에 도착했다. 역에서 고작 4km 거리라서 금방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짙푸른 동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눈을 퍼렇게 적셨다. 다소 연한 빛깔의 서해나 초록색이 진한 남해와는 다른 매력이다. 반도의 삼면의 바다는 셋 모두가 곱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동해다, 싶다.


 안목 해변에서는 눈만 호사를 누리는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향긋한 커피 내음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일어나서 콧속으로 들어왔다. 이곳이 커피 거리로 유명하다더니 과연. 프랜차이즈며 개인이 운영하는 수많은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다. 몇 해 전 한국은행 강원본부가 발간한 지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강원 동해안 지역에서 운영되는 카페는 1,000개가 넘는단다. 인구 1만 명당 카페 수는 18개로 전국 평균 14개보다 많고, 특히 강릉은 25개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처음부터 이런 풍경은 아니었다 한다. 안목해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부터 시작됐다고. 길에서 커피 한 잔의 낭만을 누리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이에 따라 길다방의 커피자판기도 점점 늘어났고, 이후 카페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지금의 커피 거리로 발전했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처럼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그나저나 커피 향이 참 좋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이 분명 어딘가의 카페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듯했다. 나 역시 커피를 즐기지 않는데도 왠지 꼭 마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내와 함께 바닷가 전망 좋은 어느 카페로 들어섰다.


 어느 카페로 들어서든지 간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강릉 여행 온 사람들은 죄다 커피를 마시려고 선착순 일렬종대로 서서 입장하기라도 한 걸까. 우리가 들어간 곳 역시 그리 이름난 카페가 아니었음에도 거의 만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카페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업종이로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카페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까. 그리고 무슨 할 얘기들이 그리도 많길래 저마다 대화 삼매경일까. 관계를 나누기 위해 마땅히 갈 만한 데가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다들 커피만 마시려고 여기 온 게 아닐 터. 사람들이 모이는, 예전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지금은 카페가 대신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주말에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이유와도 비슷한 것 아닐까.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가도 볕이 좋은 날이면 동네 할머니들이, 마치 비둘기 떼처럼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모습을 본다. 예전의 홍대 놀이터에서도 밤이면 밤마다 청년들이 한데 둘러 모여 술을 마시던 장면이 기억난다. 다들 아무래도 혼자는 외로운가 보다.


 커피, 하면 역시 책. 아니, 도넛 말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은은한 커피 향에 취해갈 때 즈음 예전에 읽었던 <커피의 역사>라는 책이 떠올랐다. 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긴 한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석회질 토양의 수질이 나쁜지라 물을 날것으로 마시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와인과 맥주 따위로 만들어 마시느라 혼몽했던 유럽인들이 중동에서 넘어온 커피 덕분에 각성할 수 있게 됐다는 것. 덕분에 이성주의와 계몽주의가 발현하고 나아가 산업혁명까지 이룩해가며 세계의 패권을 잡을 만큼 발전하게 되었단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모든 게 다 커피 덕분이란다. 그런데 그렇게나 이성과 논리가 발전했음에도 유럽인들은 왜 제3세계에 대해 잔혹한 식민 지배를 행하고, 자연을 오로지 수단으로써 취급하며 파괴하기도 하고, 2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전례 없던 살육전을 벌인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성이 극에 달하게 되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되려 야만으로 회귀하게 되는 걸까. 참 모를 일이다. 어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기 하니까 나 되게 지성인 같지 않아. 아내는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커피가 식기 전에 마시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말을 요약하자면 '인간다움'은 이성과 합리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 그래서 정신을 너무 똑바로 차리게 해 주는 커피를 조심하고 있다. 적당히, 나사 한두 개 정도 빠진 사람처럼 살고 싶다. 식후 카페에 들를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쓴 걸 싫어하고 단 걸 좋아해서 커피를 안 마신다."라고 변명하지만 이런 진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 같지만 나름의 진지한 이유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비슷한 이유로,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종종 아주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출근하자마자 이걸 마셔야만 정신이 번쩍 든다, 식사 후엔 이걸 마셔야만 오후에  처지지 않고 걱실걱실 일을 잘 할 수 있다, 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렇다. 커피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품이 아니라 마치 흔하디 흔한 기계 하나를 돌리기 위한 기름처럼 느껴지는 게다. 나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런 쓴맛 나는 까만 음료의 힘을 빌어 정신을 애써 붙들고 싶지 않다. 그렇게 나를 비인간적으로 괴롭히기 싫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엑스자로 교차시키며 "스탑 커피!"를 외쳐 본다. 이것은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나의 선언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무실에서도 그냥 졸리면 졸린 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될까요. 점심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졸린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아, 그렇다고 인사 고과에 반영하지는 마시구요. 아, 그게 안 된다면 커피 대신 핫식스라도 마시겠습니다.






2. 아이들을 박물관에 데려오는 부모들

강릉 에디슨박물관의 오래된 축음기




 강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 중 하나는 의외로 에디슨 박물관이었다. 짙푸른 동해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경포호의 아름다운 경관, 오죽헌의 고즈넉한 분위기, 비록 내비게이션을 엉뚱하게 맞추는 바람에 원조집은 아니고 다른 곳에서 먹었에도 맛이 끝내줬던 교동짬뽕집도 좋았지만 내 취향에 딱인 곳은 박물관이었다. 축음기며 카메라며 영사기, 역사 깊은 전자제품 등등 온갖 수집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눈을 사로잡는 물건들뿐이었다. 이 박물관의 주인장이자 수집광인 손성목 아저씨는 참말로 대단한 분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세계 60개국을 돌며 수집한 물건들과 토머스 에디슨의 발명품 등이 5,000여 점이나 된다. 특히 전 세계 축음기와 에디슨 발명품의 1/3 이상이 여기에 소장되어 있다. 소장품 규모면에선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수집품들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감상 중인데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박물관에 놀러 온 꼬마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귀를 찌르는 높은 음의 목청에, 쉴 새 없이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 여기 재미없다고 얼른 나가자며 부모들의 바짓단을 잡아끌며 내는 칭얼거림까지. 맞다. 내가 이래서 아이들을 싫어했었지. 이 새끼 악마 같은 놈들. 저리 썩 물렀거라. 제발 저리 가, 난 너희들이 정말 싫어. 이래서 박물관이고 미술관이고 노키즈존이야 한다니까. 아이들의 소란을 견디느라 표정이 굳어가는 와중에도 아이 부모들의 행태는 자못 흥미로웠다. 사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자식들의 취향이나 관심사 따위 고려하지 않고 이런 델 억지로 끌고 온 부모들이 잘못했지. 강릉의 수많은 명소들을 제쳐두고 굳이 여기로 온 건, 우리 아이가 이런 걸 보고서 똑똑해졌으면, 뭔가 많이 보고 듣고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터. 여기 재미없다고, 빨리 나가서 놀자고,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다들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하는 듯했다.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를 낳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걸까.


 엊그제는 집 근처의 하늘공원에 아이와 함께 갔다. 가을이면 무성함을 자랑하는 억새밭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기띠를 하고 아이를 안은 채 맹꽁이 버스를 타고 하늘공원 정상에 올랐다. 아이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버스를 탈 때부터 신기한지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돌리고 소리를 내지르고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그렇게 무척 재밌어했다. 이곳에 온 보람이 있군, 하고 뿌듯했다. 지난달에는 반포 한강공원에 가서 잠수교를 함께 걸었는데 그때도 아이는 무척 재밌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뭐든지 처음인 너는 세상 모든 게 재밌겠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겪은 몇몇 사건이나 장소나 사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점점 무감해지는 중인데. 예전에 회사의 S차장도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에휴, 재미없어. 나이 들면 알게 될 걸. 하루하루가 똑같아. 그래서 시간이 금방 가. 뭐가 새로운 게 있어야 하루가 길게 느껴지지."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이들은 첫 경험 중인 세상에 재미난 게 얼마나 많고 또 많을까, 하루가 얼마나 다채로운 빛깔일까, 오늘은 어제와 달랐고 내일은 또 오늘과 아주 다르겠지. 곁에서 함께하다 보니 나도 하루가 더뎌지고 길어졌다.


 아주 늦었지만 아이들을 박물관에 데리고 왔던 부모들에게 심심한 사과 말씀을 전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귀퉁이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신기해하는군요. 그러니 부모 된 자로서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로군요. 그저 본인의 욕심을 투영하고자 아이를 억지로 데려왔던 게 아니었군요. 그래서 나도 아이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새로운 걸 보여주려 애쓰는 요즈음이다. 설사 아이가 싫어하는 표정을 짓고 하품을 하더라도, 이게 다 너를 위해서라며 낯선 여기저기로 다니는 중이다. 역시 아이는, 육아란, 낳아보고 길러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강릉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8년 4월, 강릉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의 여운이 남아있던 강릉역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강릉 교동짬뽕


삼척에서 정동진까지 왔다


안목해변에서 커피향을 느끼면서


동해바다의 장엄한 일출


오죽헌에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떠올리며


이전 09화 유등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그때 그시절 로미오와 줄리엣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