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소리가 나를 부를 때

by 풍경

반원半圓의 손톱이

안으로만 깊숙이

파고들어 생살이 아리다


날 선 손톱이

기억을 건드릴 때마다

마음은 온통

쓰라린 사연으로

미열에 시달리고


움푹 파인 쇄골에

그리움이 흥건히 고이면

그대의 환영幻影을 좇아

점점 안으로만

침잠沈潛하고픈 유혹,


가을바람 부는

마음 저 깊은 자락에서

흩어진 기억의 흔적을 붙들고

무수히 팔랑대며 찍히는

순백純白의 향수여


가슴에

퍼렇게 맺힌 멍울이

돌덩이만큼 커져

숨이 벅찬데


그러고도

미치도록

또 아리고 싶은

이 지독한 가을 사랑이여


/


사람들은 보통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오래 간직하려고 사진을 찍는다. 특히 장기 여행이라도 떠난다면 몇 천 장까지는 거뜬히 찍는 듯하다. 완성도 높은 사진 한 장을 위해 무수히 삭제되는 사진까지 합치면 그 양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사진 찍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찡그린 표정은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김치’나 ‘브이’하며 찍힌 사진이 한두 개가 아니다. 결혼해서 친정집에 가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기를 먼저 챙기시고 아이들을 일렬로 쪼르르 앉혀 어릴 적 내게 했던 ‘김치’와 ‘브이’를 재연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에 갈 때면 어김없이 손수 제작하신 종이봉투에 손 글씨로 집집마다 첫째 아이 이름을 적어 사진을 꼭 전해주셨다.


메모광, 정리광이신 아버지는 우리 사형제의 성장 기록을 모두 보관한 것은 물론 할아버지의 생전 기록과 당신의 어릴 적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셨다. 내 물건만 보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썼던 일기장, 성적표, 상장, 학생증, 편지 등등이었으며 아버지의 물건들은 그야말로 역사의 기록이었다. 1933년생이시니 말로만 듣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록물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성적표, 학생증, 상장, 교원자격증, 입영통지서, 등등 별별 내용이 다 들어있었다. 이 자료들의 일부는 교육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일부는 당신의 생애를 적은 글을 모아 책을 만드는데 자료로 첨부하였다. 그 책은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해 제사 때 영전에 바쳤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장 가슴이 짠한 것은 사진도 기록도 손 글씨도 아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이다. 귓가를 아련히 울리는 노랫소리가 깊어가는 가을밤 하늘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지마다 그곳의 소리를 녹음한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노라면 여행지의 장면이 끊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사진은 눈을 자극하지만 생명이 없다. 하지만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때로는 강렬한 사진보다 은은한 소리가 그날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밤, 기억의 소리가 나를 부른다.


48264344_152147872419091_62.jpg
KakaoTalk_20210921_214215796.jpg
# 기억의 소리가 나를 부를 때 / 2021. 9. 21. punggyeo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