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단풍 짙은 숲으로 갑니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대지는 온 힘으로 나를 지탱해주고
바람은 훠이훠이 소리 지르며
길을 내줍니다
이파리 하나하나에
지난 삶의 흔적을 남긴 채
스르르 미끄러지면
부끄러움도 바닥을 나뒹굴고
지나는 발길에
이지러진 나는
고개 한번 못 들고
바람 따라 멀리 달아나버립니다
나는 이 가을에
무엇을 거둬들여야 할지
지난 계절에게 묻지만
한결같은 시선으로
시간 앞에 서있었을 뿐
빈 손밖에 보여줄 게 없습니다
다만 이 계절이 지나
눈발 흩날리는 어느 날
나의 여린 손 위에
하얀 눈꽃 하나
힘겹게 피어날 것을 기다려봅니다
단풍나무숲으로 갑니다
숲은 울긋불긋한 융단을 깔고 겸허히 나를 맞이합니다
투박한 바람은 나뒹구는 낙엽에 애석한 심정을 실어 멀리 달아나고
굵은 까마귀 소리는 허공을 오래 맴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계절은 고요하고도 은밀히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입니다
풍성한 가을을 모두 품고도 비움의 계절은 남몰래 자신만의 빛깔로
우리에게 또 다른 선물을 펼쳐 보일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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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節氣 상 내일이 입동立冬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유독 바람이 거칠고 차다. 얼마간은 가을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추위가 와락 달려들 것이다. 가을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월정리 바닷가를 갔다. 파도가 높고 거칠었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오가는 파도를 따라갔다. 그리고 깊은 바다로 돌아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다시 파도를 따라가기를 반복했다. 파도가 바다이고 바다가 파도였다.
나의 카렌시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월정리 바다와 한라수목원이다. 바다에서 숨을 돌리고 오후에는 수목원으로 향했다. 월정리 바다의 파도처럼 수목원의 바람도 거칠고 차가웠다. 가을의 절정에서 숲은 깊고 짙게 울고 있었다. 바람이 온 숲을 훑고 다니면서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나는 그 바람 속에서 거칠지만 온화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을은 소멸로 가는 듯했지만 자세히 눈여겨보면 나뭇가지 한쪽에서는 겨울눈이 제자리를 잡고 있고 땅바닥에도 여린 풀잎들이 피어나고 있다. 근원에서 생하고 멸하여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우주 순환의 일부를 이 계절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멸하면 겨울이 생하고 겨울이 멸하면 봄이 생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우주는 순환하고 있음이니 가을을 보내는 마음이 애석하지만은 않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나가는 가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뿐이다.
# 가을을 보내며 / 2021. 11. 6. pung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