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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쁠 때는 산을 보고 슬플 때는 바다를 봐라

by 풍경

아파트 화단에 우아하게 피어 있던 목련꽃이 한 잎 두 잎 핏기 없는 갈색 낯빛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바닥을 어지러이 뒹굴고 있다. 화려한 개화 뒤에 기필코 찾아드는 낙화의 슬픔… 꽃만의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봄은 이렇게 나를 살짝 들뜨게 했다가 다시 가라앉게 한다. 요가를 끝내고 아는 분과 함께 문을 나서는데 벚꽃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반짝거린다.


“이제 벚꽃이 필 때인데 제 눈에는 왜 벚꽃이 다 지는 것처럼 보일까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세요. 제 눈에는 갓 피어나는 벚꽃들로 보여요.
이제 곧 화려하게 필 것 같아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사물을 바라보는 데 나의 감정이 이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는 목련꽃을 좋아하셨다. 그래서일까, 목련이 활짝 피었던 3월의 어느 날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이전부터도 목련을 보면 아련했건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 감정이 더 깊어져 3월이면 으레 봄 앓이를 한차례 했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 목련은 이제 슬픔과 그리움의 꽃이 되어버렸다.

몹시 쌀쌀했던 2월의 어느 날, 아버지는 2월과 3월 달력에 해야 할 일들을 빼곡히 적어놓으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다. 그리고 한 달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 한 달 동안의 나의 기도는 점점 소박해져 갔다. 의사 선생님의 앞으로 6개월 정도쯤이라는 말조차 믿기지 않았건만 3개월, 한 달, 보름, 오늘… 그렇게 기약하는 날들이 줄어들수록 더는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그저 그 날짜에 맞춰 조금만 더 살아계시기를 기도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 낯 뜨거운 표현이지만 언니와 나는 병실에서 내내 사랑한다고 말하였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아버지를 끌어안고 손발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우리 자매는 예견했는지 모른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쓴 글들을 정리하여 만든 책

아버지는 굴곡진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여 한생을 사신 분이다. 1933년생이시니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4·3 사건, 6·25 전쟁, 군부 독재 등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살아오셨다. 더불어 힘겨운 가정사로 심적인 갈등이 많은 데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하셨고 평생 가족을 위해 사셨다.


생전에 아버지한테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써두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돌아가신 후에 자취를 감춘 원고 뭉치들을 우여곡절 끝에 찾아내어 흩어져 있던 원고들을 다시 정리하고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해 제사 때 아버지 영전에 바쳤다. 너무나 잘 살아낸 아버지의 삶을 정리해 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많은 기억 중 자주 회고되는 것이 초등학교 6년간의 일기장 검사이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즐거운 일도 아니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나 어찌어찌 습관이 되니 자연스럽게 잠자기 전에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내가 쓴 일기에 요즘 말로 이런저런 댓글을 달아주셨었다. 중학교 입학 후에는 네가 알아서 하라시며 더는 검사를 하지 않았는데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발적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글쓰기의 시작은 그때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

일기를 썼던 습관이 진로 선택에 일정 부분은 영향을 끼쳤는지 20대 중반에 국어 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동료 교사로서, 인생 선배로서 아낌없는 조언을 많이 해 주셨는데 그때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엄을 갖춘 큰 산이요, 안식처였다. 특히 당신의 교육철학과 평생교육에 관한 이야기와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글들은 지금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기쁠 때는 산을 보고, 슬플 때는 바다를 보라’고 하셨는데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니 이 말의 의미가 와 닿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4·3 사건, 6·25 전쟁을 모두 겪어내면서 심적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뒤로한 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간 회한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농약 살포, 제초제 구입..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버지께서는 과수원 생각뿐이셨다. 평생을 다 바쳐 일군 과수원이 자식들 다 키우고 나니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준 유일한 위안이셨으리라.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과수원 길' 노래를 참 좋아하셨다.

어린 시절 과수원을 누비고 다니며 꿈을 노래했던 나의 놀이터는 아버지만의 ‘무릉도원’ -아버지께서 직접 과수원 대문에 적은 글자-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무릉도원이기도 했다. 또 아버지에게는 일찌감치 당신의 케렌시아를 구축하여 늘 숨 고르기를 하는 신성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당신의 맑은 영혼은 지금도 그곳에서 숨 쉬고 계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몸소 보여주신 삶의 가르침은 지금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 나의 길을 밝히고 있다.




봄비가 하염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밤,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막아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넓은 품이 유독 그립다.

“교육은 결코 밭에 가서 김을 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망설일 필요는 더욱더 없다. … 항시 열의를 가지고 노력하면 필연적으로 익숙해지고 발전이 따라오는 것이다. … 이 아버지도 40년 봉직한 사람에 비하면 지금도 부족한 점이 많다. 앞으로 직장에 익숙해지면 엄한 훈계도 할 작정이다. 아버지 훈계로 인하여 눈에서 눈물은 흘리지 않겠지... 하하하!.…

앞으로도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아버지 앞에서 말해도 좋고 글로 써서 답답한 마음을 풀도록 하여라.

귀여운 막내딸아! 바르고 힘차게 정진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하자. -아버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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