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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by 풍경

요즘 국어 시간에 ‘할머니는 외계인’이라는 수필을 가르치고 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딸의 이야기인데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훈훈한 내용이다. 아이들과 함께 참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수업 도입 단계에서 ‘엄마가 딸에게’ 노래 영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본 다양한 버전 중에서 양희은과 김세정이 노래를 부르고 실제 모녀가 등장하는 영상이 가장 뭉클했다. 청각장애인인 어머니가 딸과 함께 수화하는 부분도 인상 깊지만 마지막에 모녀가 수화하는 내용이 자막으로 처리되고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모두가 숨죽이고 그 장면에 집중하였다. 수화가 끝나고 모녀가 서로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한두 명의 학생들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서툴러서 미안해.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내 딸 사랑해.”
“엄마 너무 제 생각만 하고 고집부려서 죄송해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엄마 사랑해요.”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친정을 가지 못해서 지난 일요일 저녁에 어머니에게 전화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고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하겠다며 내일 병원에 가려한다고 하셨다. 언니한테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전화하겠다고 하니 극구 말리신다. 4월에 있을 아들 결혼 준비로 바쁘고 몸도 지칠 텐데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당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신념이 강하신 분이시다. 몇 해 전에는 ‘지금 입원하러 병원에 왔는데 조금 있다가 맹장 수술하러 들어간다’는 연락을 뒤늦게 해 가족을 놀라게 했던 일이 있어서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간 세월이 흘러 몸도 예전 같지 않으시고 게다가 올해 87세이시니 그 신념을 접으실만한데도 여전히 자식에게 부탁하는 일을 어려워하신다.


나의 어머니는 늘 억척스럽고 독립적인 천상 제주 여인이시다. 예전부터 제주 여인들은 생활력이 강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야만 했고 억세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 또한 홀로 계신 시아버지에 시누이들과 시동생, 시조카까지 챙겨야 하는 혹독한 시월드에서 젊음을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시집 식구들이 하나둘 떠났지만, 다시 하나둘 가족이 늘어 어머니의 삶의 무게는 늘 제자리였다. 4형제를 기르느라 어머니 자신을 돌보는 일은 사치였고, 단돈 백 원에도 손을 떨며 시장에서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악다구니를 해야 했다.


어느덧 자식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일찌감치 집을 떠났고 그나마 평생을 의지했던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시면서 어머니의 가슴은 빈 껍데기가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긴 세월 속에서 닳고 닳아 버겁기만 한 육신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어머니는 그 억척스러움으로 여전히 씩씩하게 삶을 살아내고 계시다. 누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안은 깔끔하고 식사도 늘 정갈하게 다양한 건강식으로 준비하셔서 드신다. 어떨 때는 나의 살림살이가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어머니께서는 정정(正正)하게 자신과 주변을 반듯하게 살피신다.

어머니2.jpg 낡은 옷들을 수선하시는 어머니 모습

나는 여전히 철부지 막내딸로 남아 친정집에 가면 아랫목에 대(大) 자로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낮은 베개를 꺼내고 이불을 덮어주신다. 먼저 깨우는 법은 없으시다. 어쩌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렇게 단잠을 청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먹고사는 게 바쁘고 정신없어서 자식들을 따뜻하게 품어 키우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투박해 보여도 속정이 많은 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도 누구 못지않다는 것을 더 잘 안다.


예전에 사춘기 딸 때문에 속상하다는 투정을 부리면 어머니는 늘 아이 편이었다. “사랑으로, 칭찬으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늘 꼭 끌어안아 줘라. 너희 4형제를 키울 때는 사는 게 너무나 고달프고 힘겨워서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게 늘 후회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아이 편이었던 어머니가 사춘기 딸을 앉혀놓고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었다. 그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머니의 진한 향기를 온몸으로 느꼈었다.


“엄마 말씀 잘 들어라.
네가 엄마 말 안 들으면 엄마가 많이 속상해 해.
엄마가 속상해 하면 할머니 마음이 많이 아파.
너는 엄마 딸이지? 네 엄마는 할머니 딸이야.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딸이란다.”


나도 어느새 두 딸의 엄마가 되었건만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 같을 때가 더 많다. 그런데도 나이 들수록 어머니와는 여자로서의 연대감을 더 많이 느낀다. 어릴 때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길을 더듬으며 따라갈수록 더 많은 사연과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께서 직접 쓰신 삶의 흔적들

법륜 스님의 <엄마 수업>에서 자식을 낳는다고 모두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며, 자식을 키우며 가슴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숱하게 하면서 어머니가 되어가는 거라고 하였다. 여인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자식을 낳지 말 것이며, 자식을 낳았다면 엄마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온 어머니.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했고 지금 그렇게 사는 듯하다. 나의 롤모델은 어머니이지만 두 딸의 롤모델은 나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두 딸이 어떤 삶을 살든 응원할 것이며 엄마의 절대적 지지는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와 통화하다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너부터 잘살아야 헌다. 남편이고 자식이고 간에 네가 잘 살아야 그 사람들도 사는 거라. 자식이 한때 속 썩여도 지 인생이난, 지가 알앙 살아가난 너무 애타 헐 필요도 없다."


무량수경에 ‘아버지의 사랑은 무덤까지 이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른이 되었어도 사랑은 가슴에 사무치는 고귀한 행위임을 나의 어머니에게서 배우고 있다. 그리고 이 배움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지식이 아닌 지혜로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남아있는 삶을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살아가려 한다.


끝으로 어머니는 딸로 태어나서 아무 의미 없이 지어진 당신의 이름-을해년에 태어나다-을 많이 원망했었다. 그래서 미혼일 때 이름을 바꿨지만, 아버지는 술 한 잔 거하게 드시면 농으로 김을출(金乙出) 여사를 크게 부르셨다. 나도 '김정숙'이라는 이름보다 '김을출'이라는 이름이 더 정감이 간다. 평생을 자식들 이름 뒤에 붙는 엄마로만 살아오셨는데 이제는 누구의 엄마가 아닌 당신의 이름 석 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셨으면 좋겠다.


“엄마, 사랑해요.
내게는 너무나 대단한 엄마이고, 누구보다 잘살아낸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35년생 김을출 여사의 멋진 인생을 응원합니다!”



엄3.jpg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캘리그래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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