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작가 장 그르니에는 <섬>이라는 철학 에세이에서 자신의 감정대로 했더라면 개를 선택했겠지만, 그때 무덤 파는 사람이 새끼 고양이를 줘서 고양이 물루를 키우게 됐다고 썼다. 고양이에게는 자기 시간과 자기 세계가 있으며, 강아지만큼 인간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인간과 같은 공간에 살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작가는 이런 고양이의 존재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 글귀에서 묘한 공감이 들었던 것은 나의 경우와 유사해서일까? 아니면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싶어서일까?
스승 장 그르니에와 제자 알베르 카뮈
예전부터 퇴직하고 자식들이 모두 독립하여 집안이 적적해지면 한 번쯤은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을 키우는 일이 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지금은 집에 있는 큰아이를 키우는 일도 벅찬 데다가 시기적으로 일과 가정에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당장은 불가능해서 늘 생각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나의 인연은 강아지가 아니고 고양이였던가.
몇 해 전에 아는 분의 권유로 절에 다니게 되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산속에 있는 아담한 절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지 않아 더 고요하고 아늑했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절에서 우연처럼 ‘지혜’를 처음 만났다. 지혜에 대해 들은 바로는 언제부터 절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항상 굴 안에 있는 부처님 좌상 옆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 산중에 있는 절로 찾아들었는지도 신기한데 이미 신도들 사이에서 ‘지혜 보살’이라 불렸고 보살답게 늘 그 자리에서 부처님을 봉양하고 있었다.
새로운 식구 해탈이(좌)와 터줏대감 지혜 할머니(우)
무뚝뚝하고 차가운 줄 알았던 지혜는 처음에 내 주위를 배회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 일쑤였지만 차츰 그간의 인연으로 정말 나를 알아보는지 이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온다. 기분 좋을 때 가릉가릉 하는 소리를 내며 무릎 위로 올라와 앉기도 하고 머리로 내 몸을 계속 비비며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기도 한다. 처음에는 왜 보살이라 불릴까 싶었는데 그간의 지혜를 지켜보니 정말 보살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지혜와의 인연으로 고양이를 기피하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질 무렵, 큰딸이 아파트 근처에서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를 데려왔다. 며칠만 키우다가 돌려보내겠다고 했지만 머지않아 그 친구와 함께 보낼 것을 예감했다. 비염이 심한 남편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유야무야 큰애 방안에서만 키우기로 하였다. 그렇게 ‘보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눈을 피해 방안에서만 키우다 보니 사람들 오가는 소리나 쿵쿵거리는 소리에 유독 민감했던 보리는 큰딸 이외에는 경계심을 잔뜩 품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는데 작년에 큰딸이 독립 선언을 하며 집을 떠나면서 얼떨결에 보리를 떠맡게 되었다. 한동안 큰딸 손에서만 자란 보리는 내가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털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유독 낯을 많이 가린다는 고양이는 지금까지도 내게 경계의 메시지를 보낸다.
중성화 수술 후 보리 모습
큰딸이 집을 떠난 지도 어언 1년 반이 넘었다. 그사이에 보리는 중성화 수술을 했다. 아니 중성화 수술 대작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단 한 번도 외출한 적이 없던 보리를 케이스에 넣기까지도 며칠이나 걸렸고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서 작은딸과 고군분투했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수술 후 약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하기까지도 진땀을 뺐다. 그렇게 나는 고양이의 집사가 되어 보리의 밥을 챙겨주고 배변처리와 주변 청소를 하고 있다.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아침 출근 전에 밥을 챙겨주면서 인사를 건네고 퇴근해서는 꼬박꼬박 말을 건네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도 보리는 강아지처럼 작은딸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여전히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있지 않다. 그나마 얼마 전부터 조금씩 경계를 늦추는 일이 있다.
하나는 매일 저녁 시간에 간식을 주면서 보리를 꼬드기는 것이다. 먹는 것 앞에 장사 없다더니 간식을 손에 집는 순간 저 멀리부터 달려와 가릉가릉 하며 친한 척한다. 순한 양이 되어 먼저 앉은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한 숟가락 먹고 나면 날카로운 발톱을 안으로 숨기고 더 달라며 발로 내 손을 톡톡 친다. 이때가 가장 내가 으스대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간식을 다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쌩하고 가버린다. 참 짧고 아쉬운 행복이다.
거실로 진출한 보리
보리가 예전처럼 으르렁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남편이 지난해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집을 잠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딸과 나는 보리의 영역을 방에서 거실로, 베란다로 안방으로 점점 넓혀주었다. 시간도 점점 늘려서 퇴근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그냥 밖에 나와 있도록 했다.
그런데 남편이 주말에 집에 온다는 소식이 뜨면 작은딸과 나는 007 작전을 펼친다. 퇴근과 동시에 보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방향제를 뿌리고 환기를 시키는 등 삽시간에 예전 상태로 만든다. 한 번은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작은딸의 거짓말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다. 보리도 남편이 온 것을 아는지 그날은 방 안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요즘에는 보리를 보면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람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다가서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하물며 동물이라고 하여 무엇이 다르겠는가. 법상 스님의 ‘시절 인연’이라는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소유물과의 만남도, 깨달음과의 만남도, 유형무형의 일체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 모든 마주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인연의 흐름을 거스르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다.”
내게 우연처럼 다가온 보리도 어느 시절, 나의 귀한 인연일 터이니 여전히 나를 경계해도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더불어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니 시절 인연이 되어 나와 만난 지혜와 보리도 나와 함께하여 좋은 인연이었기를 바란다.
생각에 잠긴 보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강아지가 아닌 고양이와의 동거를 제대로 시작한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맞벌이 부부에, 중학생인 작은딸도 학원이다 뭐다 해서 종일 집이 비어있는 날이 많다. 한편으로는 고양이라서 서로에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강아지였더라면 사람이 그리워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어제는 퇴근 후 오래간만에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보고 보리는 건너편 피아노 위에 웅크려 앉아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에 잠겨 있는 것도 같았다. 고요히 정적이 흐르고 나와 보리는 같은 공간 속에서 각자의 세계와 시간을 즐겼다. 서로에게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이 나름 괜찮았다. 어쩌면 장 그르니에도 이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