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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다와 하늘을 보며 지내라

by 풍경

오늘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하기로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먼저 안부를 묻는 쪽은 내가 아니었다. 입버릇처럼 다음엔 제가 먼저라는 얘기를 해놓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하루의 긴 그림자를 끌고 집에 들어올 때쯤 불현듯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금세 마음이 풀리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네 생각나서 전화했다. 잘 지내제?"

얼마 전에도 교수님께서 먼저 안부 전화를 하셨다. 제주도에 일 보러 오실 때도, 뉴스에서 안 좋은 제주 소식이 전해질 때도, 대학 과 모임 행사 중에도, 멀리 중국 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 계실 때도, 가끔은 이렇게 불현듯 문득…


교수님과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 나이 꽃다운 20세 때이다. 교수님께서는 늘 양복 정장을 단정히 입으셨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여느 중년 남성이 소화하기 어려운 밝은 톤이나 흔치 않은 패턴이 들어간 양복을 거뜬히 소화하셔서 세련미가 넘치셨고 살짝살짝 보이는 흰머리가 매력적이셨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교수님을 처음 뵙기는 했지만 2학년 때 고전문학 전공 수업을 받으면서부터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면 알아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방학 때 지역문화와 방언을 조사하고 채집하는 답사 기행에 따라다니면서 교수님과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 수업할 때의 근엄한 모습과 달리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되어 많이 따랐다. 사실 전공 강의 수업보다 답사 기행이 더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때 보았던 교수님의 모습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철이 안 들었는지 그저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였다. 그 덕에 장학금도 몇 차례 받기는 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국어 교사로서 밑거름이 되도록 좀 더 진지하게 전공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고 요즘 관심을 두고 읽는 고전 도서들을 보면서 교수님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지난 시간이 매우 아쉽다. 그나마 교수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뒤늦게라도 교수님의 고전 강의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기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졸업 후 2년 정도쯤 학원강사와 기간제 교사를 하다가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정교사가 되면서부터 초심을 지키고자 다시 교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교사로서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교수님께 편지를 보내면서 마음을 다잡았고 교수님께서는 이러저러한 직책으로 바쁘신 중에도 짬을 내어 글을 보내주셨다. 무엇보다 학생 때는 편안히 이름을 부르셨는데 교사가 되니 늘 '강 선생'이라는 호칭을 놓지 않으시면서 동료로 대우해주셨고 선배로서의 조언과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을 애정으로 전해주셨다.

월정리 바닷가

특히 내 결혼식 때 부득이 참석 못 하신 것을 미안해하시면서 신혼 여행길에라도 보자며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오셔서 잘 살라고 말씀해주신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도 학과 일로, 혼자 제주에 오실 때도 꼭 연락을 주셨다.


한번은 우도 바닷가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성산항까지 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우도에 간 적이 있다. 해변에 느긋하게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계시는 모습이 천생 선비이셨다. 비가 쏟아지는 고산 자구내 포구에서 차귀도를 바라보며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도 한 컷의 사진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켜본 교수님은 자연을 가까이하시고 번잡스러운 것을 따르지 않으시며 소탈하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셨다.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즐기는 옛 선비처럼 도(道)를 따르고 삶을 관조하시는 모습이셨다. 가끔은 내게도 느긋하고 의연하게 삶을 바라보라고 말씀을 하셨었다.


“강 선생, 제주의 봄은 어떤가? 올해도 유채꽃과 벚꽃이 함께 잘 피었는가?

한라수목원의 봄

오늘 통화는 제주의 봄 안부를 시작으로 삶의 근황과 코로나로 변화하는 시대와 교육 등에 대해 긴 대화를 이어갔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탐색하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코로나로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일을 하는데 나이도 상관없어. 이럴 때일수록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리타분한 말일지 몰라도 동서양의 고전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하루에 10쪽씩이라도 꾸준히 읽어봐라. 고전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값진 산물이지만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지침서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요즘처럼 사는 방식이 달라짐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길 때는 이리 얘기도 하고...”
“강 선생, 봄 풍경과 함께 잘 지내고, 늘 바다와 하늘을 보며 지내라.
제주 풍경 좋을 때 소식 한번 전해주고.”

봉은사 풍경 소리

‘풍경’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짠했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부터 대부분의 메일이나 회원 가입할 때 아이디가 ‘punggyeong(풍경)’이다. 발음이 곱고 뜻도 좋아서 초창기부터 줄곧 써왔는데 풍경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風景)’ ‘절에서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風磬)’의 의미가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은은한 풍경 소리처럼 이제는 정말 풍경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바람이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나답게 살라는 의미로 들렸다. 세상일에 쫓겨 나를 잊은 채 허둥대며 살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서 의연하게 삶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가장 나답게 사는 날, 반가운 소식을 전해 달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늘 송구스러운 마음이 무겁게 다가오면서도 보잘것없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교수님이 계셔서 마음이 든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예전에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새겨 보는 글이다. 싱그러웠던 처음의 마음이 빛바래지 않기를 바라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다.


“교육은 항상 자기 헌신에서 오는 보람이라고 하지만 때론 힘겨움과 회의 속에서 생동하는 것이라 본다. 강 선생이 교육 현장에서 자기 자신과 학생을 번갈아 보며 느끼는 생각이 더없이 값진 것이라는(나 또한 늘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에) 감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회의, 부족감 등도 긍정하면 자기 성찰과 반성의 기초 위에서 발전적인 힘이 솟아나는 원천이 되리라 여긴다. 오히려 그 영역에 꿋꿋하게 서서 생활하는 강 선생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이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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