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저물어갈 무렵이면 학교는 새 학기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몇 학년을 맡을지, 학년 선생님들은 어떨지 해마다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에는 설렘과 긴장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올해는 지난해와 달리 학년 선생님들의 평균 연령대가 많이 낮아져서 1학년 담임선생님 13명 중에 50대는 3명뿐이다. 1학년 국어 담당 교사는 4명인데 역시나 압도적인 서열 1위다. 성적이라면 기분이라도 좋을 텐데 왠지 조금씩 외로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직에도 서서히 세대가 교체 중이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교직에 들어온 임용고시 세대들은 뭐든지 척척 해내는 만능 박사들이다. 수업도 업무도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다. 교직 문화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으니 젊은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라테는 말이야’를 외치는 꼰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아이들이 싱그럽고 파릇한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나이 든 나는 무엇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훔쳐야 할지 해마다 고민을 하게 된다.
국어 수업 첫 시간 PPT 자료
얼마 전 1학년 남학생반에 수업을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온라인 수업을 끝내고 등교해서인지 교실은 시끌벅적했다. 한 녀석이 대뜸 “저는 온라인 수업에 집중이 안 돼서 학교 수업에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넉살스럽게 말을 했다. 그래서 새 학기인 만큼 ‘금여획(今女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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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어떤 일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서 힘들거나 귀찮다고 생각되면 금방 포기를 잘한다. 자신들의 속내를 들킨 듯이 눈을 말똥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사실 마스크를 끼고 수업하는 것 중 가장 큰 장점은 표정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힘을 잔뜩 주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화났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한다. 마스크 속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그들은 모르니 가끔 수업할 때 눈은 화나 있고 입은 웃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 그 녀석이 한 마디를 또 던진다.
“선생님, 진수 형 알아요?”
“그럼,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야.”
“진수 형이 그러는데 1학년 때 들었던 수업 중에 선생님 수업이 가장 좋았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 전 교무실 앞에서 만난 진수가 떠올랐다.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가는데 진수가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러 왔냐고 물으니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한다. 어느 선생님을 보러 왔느냐고 하니 “저, 선생님이요….”라고 말했다. “나?” 이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진수는 한결같이 어설프게 ‘네’라고 했고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랑 과자를 내게 내밀었다.
가끔 부탁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 먹을 것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나는 불쑥 “뭐 부탁할 거 있어?”라고 물었다. 진수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옆에 따라온 친구들에게 물어도 진수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왔다고 했다. 진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와 옆에 계신 선생님께 아무래도 나를 찾아온 눈빛이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옆자리 선생님께서도 작년 담임 선생님이 안 계셔서 민망하니까 그런 것 같다고 해서 그날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려버렸었다.
그제야 진수의 진심을 알았다. 선생님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줘서 얼마나 섭섭했을까 싶으니 너무나 미안했고 수업 내내 진수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한편으로는 1학년 녀석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갈 일이었는데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진수에게 한 해 동안이라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그것만으로 노땅 교사의 고민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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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며칠 전 아침, 1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지호의 얘기를 들었다. 지호는 반에서 기초 학력이 모두 낮아 학습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란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를 싫어했는데 지금 국어 수업이 너무 재미있고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학기 초인지라 지호가 누군지도 몰랐다. 수업 시간에 좀 까부는 아이들은 금방 얼굴을 익히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조용한 친구인 것 같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때마침 온라인 수업 기간인지라 줌zoom 수업을 하면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호는 별말이 없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수업 시간에 지호가 질문했다. 차근차근 알려주니 지호가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누군가의 가슴에 잠시라도 의미 있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비록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적응력도 떨어지고 기계치에다가 가끔 깜빡깜빡하는아날로그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에 작은 울림이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큰 기쁨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말에는 서점에 들러 진수에게 줄 책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