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집안일을 대충 하고 낮에는 친정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어머니랑 방바닥에 드러누워 수다를 떨었다. 여느 여자들처럼 가족들 이야기, 먹을거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친구들 이야기로부터 수십 년 전 가족사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어머니의 독무대를 건성으로 듣다가 잠이 들었다. 듣거나 말거나 여전히 쌩쌩하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심이 되었는가 보다.
그렇게 늘어지게 잠을 자고는 저녁 준비를 위해 친정집을 나서는데 앞마당에 온갖 아기자기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활짝 핀 꽃들이 어머니처럼 계속 수다를 떠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코스인 바다로 향했다. 오늘은 바다가 온통 회색빛이었다. 문득 지난번 이호 테우 해변이 생각나서 다시 가보았다. 꽃내음과 바다내음이 바람에 온통 뒤섞여 내 마음까지 흔들거렸다.
집에 도착해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저녁 준비를 하려는데 딸이 별로 생각이 없다고 하자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수목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나서는 저녁 산책이었다. 아직은 해가 떨어지지 않은 데다 비가 오려고 하는지 후덥지근했다. 수목원 아래부터 갈지(之) 자로 왔다 갔다 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오름 정상에 올랐다.
때마침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정상에 서서 해지는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붉게 떠오른 태양이 서서히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저렇게 찬란히 떠올랐다가 서서히 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자 내 주변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가슴 벅차게 올라왔다.
서서히 뉘엿뉘엿 어두워지자 대지는 좀 더 부드러워지고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갖 새들의 맑은 지저귐 소리가 숲을 울리고 땅바닥 어디에서는 우렁찬 풀벌레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모든 것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온몸으로 온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절감했다. 무엇보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심경을 손으로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삶 자체가 위대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 당연함이 전부 또는 일부 소실되어 돌이킬 수 없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중요했다고 후회한다. 삶도 그렇다. 그러니 주어진 삶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늘 품고 살아야 한다. 당연함의 소중함을 배운 저녁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