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쾌활하고 활발한 주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여전히 과거의 아픔 속에 허우적거리는 주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성범죄자의 거주 반대에 관한 서명을 시작한 친구의 서명지에. 성범죄는 피해자의 삶을 영원히 파괴한다는 문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인은 친구와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범죄의 피해자이며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죠. 그 후로 그녀는 수 많은 소문과 뒷담화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편 의문의 쪽지를 발견하게 되죠. 주인의 시종일관 변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쪽지 입니다. 주인은 쪽지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쪽지는 계속해서 주인을 괴롭힙니다. 아버지는 삼촌의 성폭행 이후 집을 떠나. 시골로 도피를 선택했고, 주인의 연락도 받지 않습니다. 그건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일까요. 도피일가요.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남자 친구는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남자 친구와 성관계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맙니다. 과거의 기억 때문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주인은 비교적 과거를 잘 이겨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과거의 아픔은 주인의 삶의 일부입니다. 주인 삶에는 언제나 고통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순간도 있고, 과거의 아픔을 잊고 지내는 시간이 더욱 많습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주인은 이상한 아이인 걸까요. 아이들은 이상한 뒷담화와 소문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의해 꾸며진 이미지에 불과하니까요. 영화는 드라마틱한 반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뿐입니다. 고통과 아픔은 삶의 전부가 아니죠. 하지만 여전히 이따금 삶을 뒤흔들어 놓곤 합니다. 그 아픔 속에서 주인은 그 아픔과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용감하고도 정직한 삶의 태도가 마음을 울립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주인의 선택이고 삶이라는 것이지요. 영화는 주인을 보여주고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것만으로도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아닐까요. 피해자 다움을 요구하는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은 아닐가요.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영화가 보여주는 긍정적 엔딩에 반기를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픔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아파봤느냐.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의견 또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이란 주관적인 것이고, 결코 타인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인의 고통은 여전히 삶의 일부입니다. 고통을 안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려는 주인을 비극속으로 몰아 넣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이 긍정적인 엔딩의 의미는 단순히 상처와 아픔을 어설프게 봉합하려는 시도가 아닌. 응원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세상의 관성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있던 인식이 확장되는 순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마음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동안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커녕 그들을 더 상처받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세계의 주인은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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