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에 문장을 쏟아내다 내릴 역을 지나쳤다.
시간 약속에 심한 강박을 가지고 있어 어딘가 가기 며칠 전부터 그곳까지 가는 교통편과 걸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검색해 보고 캡처해 두고도 다음 날 출발 전에 다시 한번 검색해 보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인파에 떠밀려 전광판이 보이지 않는 사이, 고개를 숙인 채 다급하게 타자를 치다가 문득 지하철을 너무 오래 타고 있는 기분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환승역을 지나친 것이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심하게 당황했지만, 거기에 몰두하면 공황이 오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지하철을 내렸다. 지금 가는 곳은 단둘의 약속이 아닌 여러 사람이 오는 모임이고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아도, 늦어도 아무 문제 없다. 그런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몇 번 이렇게 되뇌고 계단을 올라 반대편 지하철을 탔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늘 조금 일찍 집을 나서기 때문에 역을 지나치고도 정각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어째서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이토록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걸까, 그럼 중요한 건 대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다.
이제 맨다리는 무리인가, 다리에 와닿는 바람이 소스라치게 차가워 걸음이 빨라진다. 걷다가 문득 나를 계속 따라오는 쇼윈도에 비친 나이 든 여자를 본다. 그게 나를 스쳐 가는 누군가가 아닌 내 얼굴이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란다.
점점 더 시간이, 내가 미처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간다. 아직 두툼하고 귀여운 가디건들을 전부 꺼내지도 못했는데 겨울 외투를 걸쳐야 할 것 같다.
무음으로 설정해 둔 폰에는 끝없이 다양한 이들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충전기를 꽂아두어도 배터리가 닳고 있는 폰을 바꿔야 하는데 생각만 할 뿐 새로 살 예정은 전혀 없다. 지하철에 올라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깜빡이는 폰을 주머니에 넣고 책을 꺼내 읽다가 이내 꾸벅꾸벅 존다.
알람을 끄고 3일 정도 내키는 대로 푹 자고 일어나 어디든 계획 없이 떠나고 싶다, 그랬었는데 그게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나는 지금 어디에 묶여있을까, 어째서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어른이 되었을까. 그 끝에 작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존재가 색색 잠들어있는 것을 깨닫고 거슬거슬해진 얼굴로 웃는다. 이 웃음은 나를 아주 어른처럼 보이게 해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