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농담처럼 여름은 계속되고

by 백현진

얼굴 염증이 도졌다. 쉬는 시간에 그릴까 싶어 아이패드를 챙겼다. 내 소녀들에 그토록 무수한 선이 그려지는 이유는, 내가 선을 그으며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아주 많이 읽거나 소녀들을 많이, 아주 많이 그릴 때는 겉으로 보기에는 퍽 괜찮은 취미나 생산성 높은 활동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저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고요한 싸움을 하는 중이다. 턱부터 올라오는 열감과 부기와 가려움을 느끼며 참으며 끝없이 선을 긋는다. 사람들이 말했다 나에게. 어쩜 이렇게 반듯하게 선을 그을 수 있냐고. 눈뜨고 잠들 때까지 몇 년을 몇십 년을 가만히 선을 긋다 보면 저절로 반듯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 답답한 마음이 올곧은 선이 되어 그려진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다만 똑바른 선을 긋기 위해서는 펜을 중간에 떼서도 안 되고 손에 힘을 균일하게 주지 않아도 안 되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안 되기 때문에, 선을 긋는 그 순간은 오직 선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소녀들은 이러한 이유로 모두 수많은 선 안에 갇혔다. 똑바른 선에 둘러싸인 소녀들은 안정된 마음을 가졌을까? 냉장고가 고장났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저 뚝, 퓨즈가 끊기듯 냉기가 사라졌다. 입추 지나 조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곧 가을이 오는가 싶었는데, 어쩐지 유독 운이 나쁘지 않나 생각되는 올여름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다. 나 올 여름이 지나면 다시 태어난다든가 하는 걸까? 내 주위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어 사라지고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수리 기사님은 빨라도 토요일에 오실 수 있다고 한다. 이 날씨에 냉기가 사라진 냉장고 속 식재료들은 토요일이 오기도 전에 이미 손 쓸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화가 나지는 않는다. 운 나쁜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싶을 뿐이다. 외출하느라 가방에 넣어두었던 아이패드를 꺼내 화면을 켰다. 그리고 있던 소녀가 나타난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소녀의 주위에 끝없이 선을 그려 넣는다. 몇 달만 지나도 지독히 운 나쁜 일이 재미없는 농담처럼 계속되던 여름 같은 건 까맣게 잊게 되겠지. 매미가 울고 고양이는 잠들었고, 선풍기는 돌아가는 여름의 오후 7시 12분.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4화아무것도 아닌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