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천공항 : 끝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것
“고객님, 안녕하세요. 수화물은 총 3개 체크인이 가능한데, 짐이 하나밖에 없으신가요?”
혹시라도 항공사의 체크인 수화물 허용 중량을 넘겨 추가 요금이 붙을까 걱정해야 했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15kg짜리 배낭은 이 곳에서 아주 가벼운 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낡을 대로 낡아빠진 배낭을 비닐로 포장까지 해준다. 처음으로 누려보는 호사다.
지루한 기다림도 없이 가장 먼저 항공권 확인을 마친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분된 탑승 통로도 평소와는 다르게 비행기의 머리 쪽으로 향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천까지 타고 갈 대한항공의 티켓에는 내 좌석이 01A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느껴보고 싶었다. 돈이 무지하게 많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속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은 곳. 세계일주와 더불어 일등석을 타보는 것도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코노미석만 내리 타 오다가 창문을 네 개나 차지하는 일등석 좌석에 앉아 있으니 무언가 어색하다. 사무장과 승무원들이 번갈아 인사를 하러 온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나 역시 매번 고개를 숙여 답했다. 좌석은 어떻게 젖히는 건지, 수납장은 왜 그리 많은 건지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처음으로 일등석을 타본 사람이라고 알아챌 것이다.
기내식을 고르기 전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가지고 있는 와인을 종류별로 깔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승무원 언니가 들고 있는 와인 바구니 사진을 신이 나서 찍어댄다. 어쩐지 나 혼자만 신이 난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니, 근엄한 표정의 아저씨 두 분이 천천히 식사를 고르고 계셨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밥 먹듯이 일등석을 타는 사람보다 착실하게 마일리지를 모아 겨우 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더 좋았다. 마일리지가 가장 잘 모인다는 신용카드를 만들고 나서 언젠가 실현할 로망에 들떠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게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지난 5년간 성실하게 회사생활을 했다는 지표였다.
식사를 마치자 비어있는 옆 좌석을 180도로 젖혀 간이침대를 만들어주셨다. 그곳에 누웠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이 황홀한 비행의 순간을 더 만끽하고 싶기도 하고, 귀국하기 전 내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필요했다.
헤드폰을 쓰고 최신 가요를 선택한 뒤 눈을 감았다. 이제 진짜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귀에 꽂히는 한국어 노랫말이 어색하기만 하다. 한국어가 더 어색할 정도로 긴 시간을 여행했구나.
대단한 사람들만 세계일주를 하고, 일등석을 타는 건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의 평범한 스물여섯인 내가 일등석에 앉아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세계일주까지 한 마당에 이제 새로운 로망으로 무얼 떠올려야 할까.
‘미쉐린 쓰리스타를 받은 음식점에 가보기? 호캉스 즐겨보기? 아냐, 당분간은 학생인걸.’
무언가 그럴 듯 한걸 생각해보려 애쓰다가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한 글자씩 입력했다.
‘일상에서도 여행하는 것처럼 행복하게 지내기’
간단하지만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늘어난 체중만큼 마음에도 살이 붙어서일까. 여행 이후에 맞닥뜨리게 될 현실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한국에서의 행복한 삶에 도전할 차례다.
잠시 후 인천 공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내 방송이 들려와서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한 번의 기내식을 더 먹었고, 간식으로 라면까지 아주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고객님, 행복한 여행 되셨나요?”
인천 공항에 착륙하자 사무장과 승무원들이 마지막 인사를 전해온다.
나는 보조 배낭을 둘러맨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정말 행복했어요!”
긴 여행도, 황홀한 비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끝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