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인연설화조, 공무도하가
시를 논할 때, 가장 많은 이들이 시에 입문하게 되는 계기는 아마 '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사랑이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모두가 삶을 살아가는 본질적 목적이자, 개인의 감수성을 충만하게 하는 가장 귀한 감정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랑을 다룬 많은 시들 중에서, 어쩌면 지독하리만큼 절절하고, 변함없는 지고지순을 노래한 시 두 편을 소개하려 한다.
한 편은 모두들 잘 알고 있고, 가수 이상은에 의해 노래로도 불려진 <공무도하가>이다.
현대적 시는 길이나 주제, 표현 기법의 제한이 거의 없지만, 아주 오랜 과거에는 집단의 공동 노래와 가무를 곁들인 '서사시'나 '서사 무가'의 형태로 시가 창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적 서정시는 고조선 무렵, 백수광부(白鬚狂夫)의 아내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바로 이 노래가 사랑 노래의 기원격이 된다. 이 시는 물에 빠져 죽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단순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을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설파했다.
公無渡河 임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임이 마침내 그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가신 임을 어이 할꼬. (임이여,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시가 왜 절절할까?
짧고 간결해서 그렇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장면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말리면서, 또 그가 사라져간 강물을 하염없이 넋놓고 바라보면서, 그 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 시에는 '임'을 지칭하는 '公'이 3번이나 등장한다. 예로부터 3이란 숫자는 동양에서 완전함을 의미했다. 그만큼 시적화자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그 슬픔을 절제하며, 임을 생각하고 그리워했을 것이다. 나는 이 시가 사랑하는 이와 작별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슬픔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물에 빠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거나, 망가져가거나, 실패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많이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단절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막연함은
이별 앞에서 우리를 작고 초라하게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백수광부의 아내는 그 모든 깊은 사랑의 과정을
단 4줄짜리 시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란 이토록 인간의 감정을 지극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도구이다.
그리고 또 한 편의 시, '서정주' 시인의 <인연설화조>를 소개한다.
서정주 시인은 친일 문학가, 군부 독재에 아부하며 잘못된 정치적 행보를 한 작가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차치하고서라도, 작가가 남긴 1000여편의 작품성은 비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와 언어적 감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었다.
평론가 김우창은 "그의 시적 언어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라고 평했고 평론가 유종호는 "어떤 말이나 붙잡아 늘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을 뛰어난 부족 방언의 요술사라고 부르는데 유보감을 드러내는 이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로지 글만으로 그의 매혹을 떨칠 순 없을 것 같다. 어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술은 예술대로, 사람의 삶은 또한 그 삶이 속한 운명대로 내버려두면 어떨까.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어느 연애 편지에서였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어떤 철없던 시절에 누군가와의 어설픈 연애를 하면서 이 시를 편지로 받았었다.
일종의 '연서(戀書)'였던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과 꼭 닮아서
'이것은 인연인가, 운명인가' 싶었던 사람을 만나봤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한 송이 모란꽃으로 핀 나'와 그런 나를 한 없이 예쁘게 바라봐주는 '한 예쁜 처녀'가 등장한다.
내가 너이고, 그대가 나이고,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은, 그런 묘한 동일화의 순간.
억겁의 시간이 흘러 환생한다면, 세상이 여러 겹의 시간을 갖고 있다면
아마도 '불교적 윤회'사상처럼 현생의 나는 '내생의 너'로 재탄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 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워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속에 괴어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의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도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새를 사 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양주가 그 고샛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영아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뜰에 나간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 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또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현생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시였다.
모란꽃을 매개로 나와 너가 교차되는 순간이다.
자아와 타자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이리도 황홀하게 사랑이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시 외에도 서정주 시인의 작품 속에는 '사랑과 이별'이 무엇인가에 대해 멋진 구절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시란 이토록 처절하게 아름답고 황홀한 언어를 선물해준다.
마음이 허전하고 삶이 허무할 때, 이 아름다운 시를
예쁜 편지지에 필사해보는 건 어떨까?
예쁜 글씨로 정성스레 적은 시 한 편쯤은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인의 감성은 바로 우리 가슴 속에서도 살아 숨쉬게 되리라.
삶은 때로 지저분하고 혼탁해보이지만
그 안에도 지고지순하고 절절한 사랑을 예찬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