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4.6.20에 발행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백'을 편집,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한 해의 끝자락이 보이는 계절에는 유독 '내 사람'을 챙기게 된다.
연말이 되면 모두가 따듯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듯이, 필자는 이혼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겪은 뒤에서야 내 곁의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나의 슬픔을 지나치지 않고,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들.... 나이가 적든 많든, 가족이든 아니든, 성격이 나랑 닮았든 반대이든... 중요한 건 그들이 아무것도 얻을 것 없는 순간에도 내 곁에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내게 대체불가능한내 핏줄, 나의 미니미, 단 하나뿐인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배우자는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아닌가? 평생을 곁에서 서로 보듬으며 동반자의 관계로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시대이다. 굳이 성격 차이나 심각한 갈등이 없다 하더라도, 100세 시대에 30대 초반에 결혼해서 반백년을 일관되게 좋은 관계로 유지한다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밝히지 않고 사이가 안 좋은 관계를 억지로 유지한다거나, 이미 갈라선 부부가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자식은 다르다. 내 핏줄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좋아하는 과일까지 유사한 그 녀석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내 경우 자녀가 한 명인 채로 이혼하였지만, 이혼 후에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어차피 이혼할 거, 자녀를 한 명 더 낳았으면 좀 더 다복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 했었다.
법적으로, 싱글맘과 싱글대디는 자녀를 입양할 수도 없기에, 하나뿐인 자녀가 더 소중해진다.
어차피 30,40대의 내 인생은 자녀를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업일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를 키우든, 둘을 키우든, 셋을 키우든, 경제적 여건만 된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과거에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자녀를 넷, 다섯씩 낳지 않으셨다면, 아마 우리나라가 이토록 발전된 선진국이 되기도 어려웠을 테니. 사람이란 그렇게 귀한 것이다.
이렇게 자식이란 그 존재와 탄생만으로도 부모의 삶을 든든하게 하는 귀한 존재다.
그런데 나는 보너스로, 다정하고 달콤한 성격의 아들내미를 얻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우리 아들은 보통의 사내 녀석들 같지 않았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타고난 천성인 건지, 아직 어린 소년인 탓에 부끄러움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천사 같은 아이여서 그런 건지... 도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녀석은 늘 달콤하고 다정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엄마는 365일 예뻐요~'
"엄마는 천국에서까지 예쁠 거예요~"
"나는 365일 연중무휴 행복해요~"
.....!!!
그 어떤 휘핑크림이나 캐러멜보다도 달콤한 말들.
언어가 이토록 달달하고 몽글몽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무뚝뚝한 츤데레 같은 나로서는,
이런 쏟아지는 고백들에
뭐라 답을 해줘야 할지 동공이 흔들린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와,
딸을 키우는 아빠들은,
이렇게 이성 자녀들에게 가끔 심쿵하는 순간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든든하고 핸섬했던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면, 엄마가 된 이후로 내게, 가장 멋지고 핸섬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은 내 아들 녀석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너란 존재가 내 곁에 있어서.
한부모 가정인 우리 집은 비록 2인 뿐이지만,
세상에 오직 너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천군만마이다.
존재만으로도 기쁨이며 위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항상 다정한 분위기에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갈 수 있어서,
이미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행복에서 '복'은 타인이 내게 선사하는 수동적인 행운이 아니다.
'복'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위해 따듯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부스럼 같은 거더라.
그러니, 앞으로 남은 생애에 내 아들 녀석이 세상은 따듯하고 아름다우며, 살아갈 가치가 충분한 좋은 곳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 나직이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