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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Dec 06. 2024

모든 것을 다 해주고픈 마음이야.

( 이 글은 24.7.31 발행한 글을 재구성, 편집했음을 밝힙니다.)


애ː지-중ː지, 愛之重之,  금지옥엽(金枝玉葉).

귀한 자녀를 아끼는 마음에 관한 말들이다.


최근 적지 않은 20,30대 젊은 이들이 자녀를 낳고 싶어한다고 들었다. 

마땅히, 그럴 것이다. 아마, 자연의 섭리 아닐까?

자신을 닮은 후손을 이 세상에 남겨, 종족을 보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있을 테니.

게다가, 귀하게 자라나 사랑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내 자녀에게도 그 사랑을 내리 사랑으로 물려주고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께 귀한 딸로서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도 갚을 수 없는 크기로 과분하게 받고 있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40이 넘어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다 큰 딸에게, 주에 2,3회씩 오셔서,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앉아서 쉬어라. 일 하고 와서 얼마나 피곤하니."

엄마의 정성스런 밥상을 아이처럼 맛있게 받아먹고,
뒷정리라도 도와드리려고 하면 또 이러신다.
"됐어. 엄마가 할게. 너는 저기 가서 쉬어라.
엄마는 안 힘들어. 엄마 없을 때 하면 돼지~"
....

가끔은 또 귀찮게시리 물어보신다.

"뭐 먹고 싶은거 없니? 밥은 먹어야지. 엄마가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그래."
아직도 내 밥상을 차리다 못해, 늘상 '밥 먹는 일'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고 끊임없이 내 안위를 걱정하시는 단 한 사람. 나의 어머니다.  


아마, 이혼 후에 돌싱이 된 이후로, 친정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고, 정말로 홀로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분들도 계실 텐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부모 복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부모님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내 자식이 마흔이든, 쉰이든, 예순이든, 심지어 칠순 노인이 된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님 보시기엔

물가에 내놓은 새끼 오리처럼 안타까워 보이시나보다.


昊天罔極이라 했다.

부모님의 은혜는 끝없는 하늘과 같이 크다는 말이다.


세상에 내놓은 내 새끼가 어찌될까 걱정해서 그 걱정에 눈도 편히 못 감으시는 세상의 수많은 부모님들...

그분들의 걱정과 관심과 사랑으로 어른이 된 우리가 힘든 세상 속에서도 이렇게 하루 하루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크신 사랑에 감탄하며, 곤히 잠들어 있는 내 새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말 그대로, 어디 하나 안 귀한 곳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사랑스럽다.

대중 가요 가사처럼, 정말 딱 '사랑스럽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어여쁘다.'


잠시 노래 한 곡 소개해본다. 여기서 '여자'를 '아들(또는 딸)'로 바꿔부르면 딱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8qWKnx2IWF0


'Oh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Oh 니가 나의  여자라는 게 자랑스러워  기다림이 즐겁고 이젠 공기마저 달콤해 이렇게 너를 사랑해 세상이 힘들어도 널 보면 마음에 바람이 통해 이런 게 사는 거지 이런 게 행복이지 이제야  느끼게 됐어 나를 온종일 우울해도 널 보면 머리에 햇빛이 들어 이렇게 놀라운 게 사랑이지 기다린 보람이 있어  지난번 사랑처럼 울까봐  한참을 망설였지만  보채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너 편안하게 스며들어와  Oh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Oh 니가 나의  여자라는 게 자랑스러워'




너무 팔불출인가?
하지만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리 자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야 사랑으로 가득찬 아이로 자라날 것이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 높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라날 것이기에.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사랑은 나만 준 것이 아니다. 

자녀들도 부모가 모르는 순간에도, 부모님에 대한 치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 내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의 뒷모습을 따라오며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ㅡ


아이가 미술 학원에서 그려온 그림에서

아빠는 한가롭게 풀밭에서 꽃향기를 맡고 있었고, 엄마는 거대한 뒷모습을 보이며 홀로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도 꽃 좋아하는데... 그리고 엄마는 왜 뒤돌아 있어?"

"아빠가 꽃을 좋아한대요ㅡ 그리고 엄마는 바쁘잖아요ㅡ 엄마가 저 옷 입고 있었어요. 나는 괜찮아요."


아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나보다. 나는 모르는 것들을 아이가 더 많이 알고 있다. 아이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늘 바쁘고 고달픈 엄마의 뒷모습이었던 걸까.


제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혼자 아이를 키워야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 마음이 애틋해진다.


부족한 한쪽 부모의 역할을 두 배로 더 잘 해주고싶고 남들 못지 않게 지지해주며, 모든 것을 다 해주고싶은 마음이었는데. 알고보니 아이는 자신은 괜찮다며,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부모의 마음을 훨씬 더 깊이 헤아리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 조급한 마음을 들키지 말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애쓰면서 앞으로 달려가려하지 말고, 아이의 뒤에서 지켜봐주는 느긋한 어른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한 부모든, 두 부모든, 누구나 제 자식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물려받은 사랑만큼, 아니 그 반에 반 만큼이라도, 자녀에게 표현할 줄 아는 다정한 부모가 되고 싶다.

그리고 등을 보여주는 부모로서 늘 허덕이며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자녀들은 다 알고있다. 

더 해주고 싶고, 대신 아파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때로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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