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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Jun 13. 2022

어색하진 않지만, 딱히 할 말도

오늘 어머님이 교회 권사님들과 1박 2일 일정으로 속초를 떠나셨다.

그러니까 드디어, 내가 센스를 발휘해볼 찬스가 왔달까...?


약간 초딩 입맛의 아버님은 기름지고 튀기거나 자극적인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시는데, 주로 중국음식, 피자, 도넛, 빵, 치킨, 과자 등이다. 해물 종류도 잘 드시지만 물에 빠진 고기는 또 안 드신다. 이런 입맛의 아버님은 한식으로 저녁을 드시고 나시면 꼭 간식을 찾으시는데, 눈치껏 내가 빵을 5종류 정도 사다 놓으면, 다음날 빵 봉지는 빈 봉지가 되어 있고... 어머님은 반쪽 정도, 나는 하나도 못 먹고 홀라당 사라지는 것이다 ^^;;;





어머님은 '당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자꾸 먹는다'면서 아버님 면박을 주기 시작하고, 옆에서 뻘쭘해진 나는 '아버님이 아침은 그래도 꼭 샐러드 드시고 관리 잘하시는 거'라면서 아버님 역성을 든다. 지난주 내가 퇴근길에 몇 차례 치킨을 시키려 시도했지만, 어머님의 단호한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는데, 오늘 드디어 치킨을 시킬 기회가 온 것이다!



"아버님~ 오늘 저녁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집에 너가 저번에 사다 놓은 만두도 있고, 우리 그냥 국수에 그렇게 먹지 뭐~ 뭐 사 오지 말고 조심히 와"


특별히 오늘 뭐 드시고 싶은 건 없는 거구나 생각하고 옳다구나 앱을 켜 집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치느님이 올 수 있게 치킨을 시켰다.


"아버님~ 제가 먹고 싶어서 방금 치킨 주문해 놨어요. 그런데 오늘 퇴근 길이 엄~청 막히네요. 혹시 저 오기 전에 치킨 오면 받아주세요~"

"아~~ 그래? 오냐, 알았다~" (청각으로 미소가 보임)



아버님이 가장 애정 하는 치킨 브랜드, BBQ를 보시고 "어?? BBQ네!" 하며 흡족해하시던 아버님. 어머님은 담백한 걸 좋아하시는 타입이라 식구들이 모이면 대부분 굽네나 교촌만 시켜 먹었던 터.

물가가 오르긴 많이 올랐는지 한 마리에 21,000원이나 했지만 예전에 비해 어쩐지 닭이 작아진 느낌이다.



몇 개 밖에 안 먹었는데 이거 양, 실화?


 

각자 세 쪽 정도 먹고 나니 몇 조각 남지 않게 되었고, 아버님과 나는 서로 마저 먹으라며 실랑이 시작.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강아지 산책시켜야 한다며 천천히 마저 드시라고 하고 집을 나섰다.






우리 아버님은 정말 과묵했던 우리 아빠와는 다르게 사랑 표현도 넘치시고 대화도 핑퐁이 참 잘 되는 유쾌한 분이신데, 오늘 나와 아버님 둘만 남은 시댁은 절간이 되었다.


8시도 안 됐는데 '오늘 피곤하다'며 주무시겠다고 방에 들어가시는 아버님. (오늘 외출 한 번 안 하셨다면서)

그리고 따라붙는 말. "너도 편히 쉬어라~ 공부 쉬엄쉬엄 하고."

(아버님의 속마음 '집사람 없으니까 나도 오늘 TV도 좀 보고 쉬어야겠다~~')



그런데 나, 왜 아버님이 방에 들어가니까 TV가 이렇게 떙기지? 마치 자유시간을 얻은 것 마냥.

괜히 책이 눈에 안 들어오고.

괜히 오늘 더 시원한 것 같은 늦봄의 저녁 바람은 뭔데?



오늘따라 휑~한 거실



그렇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안방에도 TV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버님 편히 쉬세요^^)


그러니까, 둘만 있다고 딱히 어색하진 않지만 특별히 할 말도 없는 거.






그래도 오늘, 퇴근하는 내 발에 애처롭게 걸린 구멍 난 덧버선을 보고 해 주신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냐 하면...

아버님의 유전자를 닮아 두 아들은 키가 그다지 크지 않고, 첫째인 우리 남편은 발가락과 손가락이 정~말 짧다. (내 엄지발가락과 남편 중지 길이가 엇비슷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키 크고 손발 큰 여자가 예쁜 여자'라고 세뇌당해온 두 형제는 자기와 키가 비슷하고 손발이 큰 두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두 부부-네 사람 모두 170과 175 사이^^. 세뇌가 이렇게 무섭다)



나를 여자 친구라고 남편이 부모님에게 처음 소개한 날, 우리 아버님은 내가 '명품 손발'을 가졌다며 환하게 웃어 보이셨었다.


오늘 그 '명품 발' 얘기가 나온 것이다.

덧버선을 뚫고 나온 내 발을 보시고선,


"그건 너의 발이 명품 발이라는 걸 입증해 주는 거다"

못 볼 꼴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 애써 희미한 효과를 주었어요


아침에 새로 뜯은 덧버선도 저녁이면 뚫고 나오는 칼발. (이미 무수히 사망한 덧버선이 있다)

2세의 키와 발가락 길이는 보장해 준다는 그 명품 발. (그러나 2세는 아직 없는 아이러니)


20대의 나는 발이 큰 게 싫어 그렇게 옥죄는 신발을 신고 다녀서 발가락이 다 구부러졌는데,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봐주면 미웠던 큰 발도 '명품 발'로 거듭난다.






늘 며느리 예쁘게 봐주시는 아버님, 오늘은 자유시간 많이 가지시고 내일 어머님 오시면 알콩달콩 수다 떨어요~

제가 회사에서 얄미웠던 사람, 이상한 민원 거는 사람들 얘기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할게요!

(누구 칭찬하는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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