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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Oct 20. 2022

와인바에서 찾은 자아실현의 의미

제주도 LMNT

이 글은 절교했던 친구와 다시 연락하게 되면서 30대 후반의 두 친구가 함께 다녀온 제주여행 이야기를 엮은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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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교했던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2. 제주도에서 알게 된 맛집의 의미

3. 결혼은 관계의 무덤인가

4. 너는 이제부터 테레사00이야

5. 맛집을 오면 부모님이 생각나



아늑한 호텔에서 친구와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맛있는 안주에 와인을 한 잔 기울인다면 얼마나 더 멋진 추억이 될까.

나는 제주여행 중에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분위기 좋은 와인이나 칵테일바'를 꼽았는데, 친구가 반색하며 딱 맞는 곳을 알고 있다고 했다.



초록의 기운이 넘실대는 숲 속의 와인 바.

인스타그램 DM으로만 예약을 받는다는 그곳은 주차 후 들어가야 하는 입구에 간판조차 걸어놓지 않는다.


오, 느껴진다. 찐의 향기가.


'LMNT'라는 힙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와인 바는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였는데, 'walk in'도 받는다는 안내를 보았다며 친구가 오픈 시간에 맞춰 가 보자고 제안했다. (walk in은 예약 안 한 손님도 자리가 나면 들여보내 준다는 의미인데 '무기한 대기'를 전제로 함)



오픈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데 애매하게 시간이 남았다.


그냥 와인바 포기하고 마사지를 받을까?


제주의 유명한 곳에서 마사지는 다 받아봤다는 친구는 그랜드조선호텔 마사지샵이 단연 최고라고 했는데, 마사지샵 빈 시간이 우리의 여유 시간에 맞질 않았고 결국 LMNT를 어떻게든 기다려서 가 보기로 결정했다.


진짜 이런 곳에 와인 바가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친구를 따라가다 보니, 정말 유리 건물이 등장했다. 밤엔 건물 주변에 조명으로 인해 더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는 그곳에서는 예약을 하지 않은 손님은 받을 수 없다고 하더니 2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을 덧붙이니, 자리가 나면 연락해주겠다고 하며 연락처를 받아 갔다.





잠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오픈한 지 20분 만에 연락이라니, 노쇼가 생긴 게 분명했다.


'대기번호 1번 고객님 지금 입장해 주세요. 5분 동안 미 입장 시 대기 접수가 자동 취소되며, 다시 대기 등록을 해주셔야 합니다.'


주차하고 건물까지가 5분인데 5분 동안 미 입장 시 대기 취소라고? 친구랑 나는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LMNT 주차장에 도착해서 친구가 주차를 하는 사이 나는 먼저 발에 불이 나게 뛰어갔다.


호흡도 가다듬지 못하고 LMNT를 들어서자, 종업원은 노쇼가 생겼다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대기가 취소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와인 바는 야외 테이블까지 합쳐 봐도 좌석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부터는 와인 잔이 아닌 와인 병으로만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매출이 나오려면 그러겠구나 수긍이 갔다.


그날 판매 가능한 와인들을 쭉 진열해 놓고, 와인들마다 별점, 맛의 구성(단맛, 바디감 등), 원산지, 가격 등을 표기한 꼬리표를 달아놓아 손님들이 편하게 둘러보고 와인을 고를 수 있게 했다.


우리는 단맛과 바디감이 5단계 중 2단계이면서 별점이 4점인 10만 원대의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그리고 함께 주문한 관자구이와 오일 파스타.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리는 해산물 요리였는데, 플레이팅도 맛도 훌륭했다.



나 : 나 얼마 전까지 엄청 퇴사하고 싶었어. 회사 다니는 의미를 못 찾으니까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어지더라고. 막 당장 사표 쓰려고 규정에서 퇴직금 얼만지 계산해 보고 그랬잖아.
친구 : 지금은 괜찮아?
나 : 응, 괜찮아졌어. 내가 회사를 단순히 월급 받는 곳으로만 생각하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 성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회사에서도 관점만 다르게 가지면 얼마든지 배울 게 있겠더라고.
일과 사람, 두 가지에서 관점을 달리하기로 했어. 주어진 일만 하는 건 누구나 하는 거고, 앞으로는 주도적으로 기획하면서 일해 보려고. 그 모든 과정과 성과가 발전을 만드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런데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인데 피상적인 관계로만 남는 것도 너무 슬픈 일인 거야. 퇴사 이유 1위가 사람인 것처럼, 동료가 좋으면 일도 즐겁고 동료가 별로면 일도 견디기 어려워지잖아. 회사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 하고 있어.



역시 술이 들어가야 얘기가 술술 나온다.



친구 : 너 같은 직원들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기획의 마인드가 사실 사장의 마인드거든. 내가 우리 회사에서 정말 여러 직원들 거쳤지만,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직원들 정말 흔치 않아. 나는 직원이랑 따로 식사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냥 밥 사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얘기를 통해 그 직원 성향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싶어서야. 그래야 더 딱 맞는 일을 줄 수 있으니까.
나 : 너 남편만 회사를 주도적으로 운영한 게 아니었구나. 직원한테도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 쓰고 너 정말 몰입했구나.
친구 : 응. 나 보이는 이미지랑 좀 다르지? 친구들도 우리 남편만 회사 운영한 줄 알아.
나 : 내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때의 너는 수업 시간에 거의 졸고, 쉬는 시간엔 나랑 매점 가는 건데?
친구 : 하하 그러게 말이야. 공부는 지루해서 그랬나 봐. 아까 너 얘기 들어서 말인데, 그렇게 네가 CEO 마인드로 일하다 보면 예상 못한 발전이 있을 것 같아. 우리 직원 중에서도 출근길에 업무 관련된 매거진을 9개를 읽고 온다는 직원이 있었어. 그래서 내가 따로 구독료를 지원해줄까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괜찮대. 나는 그 직원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어떻게 달라질지 무서울 정도라고 생각하거든.
나 :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니까.



친구는 회사 초창기에는 일과 일상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퇴근 후에도 일을 했다고 한다. 아주 재밌게 몰입해서 일하다 보니 회사가 성장했고, 3년 전부터는 세세하게 실무를 보지 않고 부하 직원에게 위임해도 될 만큼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되는 데까지 꼬박 7년이 걸렸다고. CEO가 권한을 다 직원에게 위임하고 CEO는 전략 짜고 관리만 하는 것은 중소기업 실정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친구가 이룬 안정적인 사업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새삼 느껴졌다.



나 : 나는 회사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잘하는 걸 찾아서 개발하다가 때가 이르면 퇴사하는 게 내 목표야. 어느 책에 보니까 자아실현도 경제적 자유를 이룬 후에야 가능하다고 나오더라고.
친구 : 음... 나는 자아실현을 하다 보니까 경제적 자유를 이뤘는데? 몰입해서 일했던 그 자체가 자아실현이었어.



단순히 내가 원하는 삶을 누리는 것을 자아실현으로 생각했던 나는 그것의 의미를 취미생활 정도로만 규정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향해 끈기 있게 달려가는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친구처럼 밤낮 구분 없이 몰두해도 재미있는 '그 일'을 찾는 게 급선무인 것일까, 경제적 자유를 위해 당장 재미는 없어도 돈이 되는 일을 해 봐야 맞는 걸까.


전자는 뜬구름을 잡는 얘기 같고, 어느 세월에 그걸 찾나 싶다. 후자는 '나'라는 인격체의 성향은 고려하지 않고 돈만 바라는 활동 같아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 든다.


요즘 사람들은 마땅히 좋아하는 것이 없으며 그래서 열정을 쏟을 대상이 없다고 말한다. 분명한 건, 진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호기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난 좋아하는 게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은, 필요한 것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좋아하게 된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좋아하는 것을 찾기 이전에, 필요한 것을 좋아하는 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매진해 보라고 말이다.
<월급쟁이 부자로 은퇴하라(너나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원하는 게 뭔지 분명히 하는 거란다. 그다음 시간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매일 최선을 다해 써야 한다. 의미를 발전시켜 나가고, 고된 시간을 겪어내야 해. 네가 보지 못한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해.
<부자의 언어(존 소포릭)>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생의 풍족함.


풍족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담요가 되어준다. 그리고 내게 안전망이 되어준다. 충분한 돈이 주는 궁극적인 축복은 돈이 충분한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화는 값을 매길 수가 없다.
<부자의 언어(존 소포릭)>


나는 몇 십만 원짜리 깔창을 생활비 걱정 없이 사서 엄마의 걸음걸이를 편하게 해 드리고 싶고, 내가 신혼 때 속초를 모시고 간 것이 최초의 가족여행이었다고 하는 우리 시댁과 제주도 여행도 가고 싶다.


무엇보다, 현재 벌이가 전혀 없으신 시부모님께 넉넉한 생활비를 보내드려서 장 볼 때 많은 고민을 하시지 않게 하고 싶다.


우리 가족의 따뜻한 담요가 되고 싶다.



이제 탐색전은 그만하고, 해 볼 때이다.

나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하는 일-을 명확히 하고 가진 시간을 활용할 때이다.


다음에 친구를 만날 땐, '나도 지금 자아실현 중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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