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혈관에는 고줄된장이 흐르고 있어

커피는 후발 주자일 뿐

by 무화
걷는다. 콧구멍은 자아라도 있는 듯 나댄다. 전포 카페 거리엔 커피 볶는 향을 압도하는 향이 있다. 기름진 육향이 짙게 벤 된장 국물의 향. 과거 수많은 분식집들의 라면(ㅇㅅㅌㅁ도 된장 베이스라지?)을 계승한 라멘 향. 속절없이 시간 여행을 한다. 레드 썬!




신촌리 470번지의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두들겨 팬 빨래를 개울가에 던져두고 소꼴을 벤다. 아찔한 햇빛에 구워지기 전에 샅샅이 동네 탐험을 하고 정성스럽게 쭈쭈바를 셀렉 한다.

그리고 '수페'로 간다.

언제부터, 누군가로부터 붙여진 이름인진 알 수 없지만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 큰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그곳을 우리는 수페라 부른다. 읏차! 하고 오르면 종아리가 당기는 높이의, 미로 같은 길들이 구불구불 나무를 둘러싼 곳. 수페 가자. 수페서 만나자. 수페서 뭐하꼬. 단 한 그루지만 새털처럼 많은 유년의 시간처럼 쏟아지는 아름드리 숲.

그곳엔 심심함이라는 단어를 내쳐버리는 마술 같은 힘이 존재한다. 고개 숙인 자들의 엄숙함. 진지한 분투. 냉혹한 자본주의의 세계.

고구마 줄기 까기.


어떤 구성원이든 한 명 이상 고구마 줄기를 펼친다. 동시에 그 채소를 갖고 있는 자가 누구든, 우리는 일용직으로 선발된다. 품삯은 '내가 깐 고구마 줄기 적당히 가져가기'. 적당히라는 임금 체계를 체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시골 살이엔 무수한 암묵적 규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이를테면 동네 바보 석구 씨가 밥을 먹으러 오면 밥뿐 아니라 담배 한 까치도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적당한 서비스.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기를 해 보았는가.

얼핏 시시해 보이는 이 행위는 몹시 전문적인 작업이다. 일단 오동통하면서도 연해 보이는 녀석들을 물색해 재빠르게 잡아채면서도 무심하게, 심드렁하게, 하기 싫은 척 가져간다. 나 이런 거 볠론데.

한 줄기를 고른다. 줄기를 뚝 분질러 단번에 일사천리로 샥, 벗겨낸다. 껍질이 벗겨지는 이 과정은 부전역 산 곰장어 집의 꿈틀대는 녀석들의 자태를 떠오르게 한다. 속살을 파고드는 손맛. 아찔한 설렘.

즙이 살짝 감도는 연한 고구마 줄기를 내 허벅지 옆에 소중히 간수한다. 호모채지프스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는 한눈판 사이 약탈의 위험에 처할지 모르므로 일정량이 모이기 전까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손톱 끝이 까매지고 덩굴손처럼 꼬부라진 껍질이 수북하게 쌓이면 그제야 농을 치고, 아량을 베풀고, 노동요를 부른다. 우우리들 마으메 비치 이따면.


아름드리나무는 뙤약볕을 가려주어 시원하지만, 쿰쿰한 시멘트 냄새도 선사한다. 머리 위엔 빛이 없지만 쿰쿰한 마음에는 빛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노랫가락. 자못 영엄한 기운을 내뿜는 나무 아래 거룩하게 노래한다. 여르멘 여어르멘 파랄꺼ooㅐ요.


가공물을 할매에게 가져간다. 위풍당당한 나는 요청 따위 하지 않고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핀다. 안으로 당겨 긋기엔 담력 부족이므로 팽팽한 활시위에서 손을 놓듯 아궁이 속 짚으로 성냥불을 던져 넣는다. 몹쓸 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재빠르게.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 아무렴.


집 된장과 똥 안 딴 멸치, 하지감자, 약 올라 살짝 매워진 풋고추, 마늘 다짐, 고구마 줄기 한 움큼. 그리고 할머니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한데 어우러진 고구마 줄기 된장이 활화산처럼 포효한다. 얼쩡대다가 입을 벌린다. 국과 찌개 사이의 그 음식은 펄펄 끓지만 시원하다는 모순적 미각세포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가만있어 봐라. 머라 해야 되노.


맛 있 다.


우리는 겁쟁이 유전자의 후손이다. 호기심 충만한 호기로운 선구자들은 장렬히 사망하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이미 유산으로 남겼다. 나는 화성에 가져갈 구황 작물로 두말없이 감자를 골랐다. 그러나 효용성이라는 질문을 추가하면 선택지는 달라진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작물이다 고구마는.


할매의 고구마 줄기 된장은 윤색되고 재구성되어도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다. 그리고 햇살이 따가워질수록 RAM에서 경로 이탈을 지시한다.



라멘 국물을 삼킨다.

오래전 진공 포장됐던 여름이

달그락달그락 천천히 해동되기 시작한다.

나는 수페에 앉아 있다.

껍질 벗긴 고구마 줄기가 내 무릎 위로 툭툭 쌓여 간다.

손톱 끝은 까매지고 땀방울은 짭조름하게 입꼬리로 낙하한다

그 여름의 된장이 다시 끓어오른다.

네 혈관에 고구마 줄기 된장이 흐를 차례다.


지금.


바로 지금.



쇼미더여름방학 1 (부록)


옆집 수탉 울부짖는 소리에 일어나 모기 몇 방 물렸나 세고 오줌 누고 가지 따먹고 마중물 한 바가지 우물펌프에 밀어 넣고 아차차차! 비명 내지르며 박력있게 세수.

땀에 쩔어 밤새 산화된 옷 벗어제껴 스뎅다라이에 던져 넣고 양재물비누 옆에 차고 개울가에 삼삼오오 집합. 비누칠해 그대로 정오까지 내팽개쳐 둬. 운수 나쁜 거머리 쉑휘 천지 모르고 상륙작전. 자비란 없다. 양잿물 샤워. 다음 생엔 공주로 태어나라 뇌까렸었네.


소여물 주고 아침 먹고(욱여넣고) 탐구생활 끄적이다 점심밥 준비 언제나 고구마줄기 넣은 자박자박 된장찌개. 손톱 끝이 까매지면 위풍당당 밥벌이부심. 어린 녀석이 근로의 참맛을 알았지. 100원 획득하면 그 길로 전빵까지 전력 질주. 쭈쭈바는 왜 그리도 짧은지. 하루 종일 빨아먹어도 줄지 않는 쭈쭈바를 내 언젠가 만들겠다 장담했었지. 풋. 풋. 풋내기 시절.


점심 먹고 개울로 가 부글부글 빨래들 두들겨 패 쥐어짜고 대충 털어 빨랫줄에 척 걸쳐도 해 떨어지기 전 까진 말라. 내 목도 말라. 얼굴도 말라. 펌프질 해 쾌남 빙의. 등목하고 목구멍으로 지하 암반수 쏟아붓고 자빠져 잤지. 몰래 바른 숙모의 워시오프 오이팩 내 얼굴엔 존슨즈베이비 로숑. 버짐 생겼다고 혀를 차는 할머니의 근심 뒤로 나는 손에 땀을 쥐었네.


질펀하게 낮잠 자고 일어나 불 피우고 저녁 준비. 촌에 별반찬 있겠냐 뭘 먹어도 꿀 맛(사실 짠맛). 바삭해진 빨래 걷어 접는 시늉만 해 밀어 두고 해지는 논두렁에 나가 진격의 거인 변신. 청개구리들 겁주기. 길 잃은 소 소똥 따라 정찰하기. 반딧불이 잡겠다고 눈 뜨고 아웅 하기. 그림일기에 혼신의 힘 쏟아붓고 촌 라이프 디퓨저 모기향 피우며 기절했어.


내일은 우물가 청포도가 몇 알이나 익을까.

변소에 빠트린 꽃들에게 희망을에도 희망은 있을까?


풋 풋 풋내기의 쇼미더여름방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