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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와,

호모 비아토르

by 무화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존재를 확인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자의 근원적인 존재론,

통제 불가능한 대상을 찍어 누르는 행위.

그러니까, 걷는다는 것은 생존의 최소 단위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다 적어도 내겐.



오랜 골목을 걷는다.

좁은 골목, 낡은 간판, 창문 속 희미한 불빛,

길바닥에 흩어진 낙엽. 오래 씻지 못한 노인이 새 옷을 입은 듯한 냄새.

새롭지만 익숙하고, 익숙하지만 매번 낯선.



익숙한 골목길의 반복 속에서, 불안은 형태를 갖는다. 길은 내 불안을 견디게 하는 리듬과 공간이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닮아 놀란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형체, 한 발짝씩 내딛지만 끝없이 제자리.



아이의 모래성처럼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카페들의 이름은 다 ‘어떤 감정’이나 ‘기억’을 팔고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캐러멜 시럽처럼 녹아 있다. 향기에 현혹됐다가 그리움에 취하기를 반복하는 일. 커피를 마시지 않은 채 걷는다. 깨어나는 게 싫다. 깨어나면 또 방향을 찾아야 하니까.



,조각조각 미학 일기> 편린



자코메티는 인간의 존재를 움직임과 공간의 관계 속에서 드러냈다. 나는 인간은 움직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걷는다는 건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다. 걷는 순간, 인간은 세계 속에 놓인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멈추면 존재의 중심이 흔들리고, 삶은 공허해진다.

그가 남긴 형체처럼, 우리는 가늘고 길게 존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라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안에 투사된 존재-세상-라 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길 위의 존재’라 불렀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계속 가는 존재.



그 말엔 위로가 담겨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가는 중’이라는 건,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도착하지 못하는 건 결국 불안의 다른 이름이니까.

결국,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불안과 책임,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적 행위인 셈이다.



나는 호모 비아토르다.

끝없이 걷지만 결코 도착하지 못하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걸음 하나하나가 내 존재를 증명하며,

불안을 곧 살아 있음의 증거로 감각하며.



전포동의 밤, 좁은 골목, 낮은 밀도의 소음과 희미한 불빛 속에서 나는 내 발걸음을 느낀다.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어떤 빛은 어떤 시절로 끌고 가 기어코 쓰라리게 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걷는다.



걷는 동안,

삶이 여전히 아름답고, 존재가 대단히 기쁘다는 것을 느껴보려 한다.

걸음 하나하나가 나를 증명하고,

그 증명이 모여 삶이 된다는 믿음





비탈길을 걸었다. 변하여 나빠진 풀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용덕면 신촌리의 기억들에 불순물이 없는 이유가, 그야말로 불현듯 팟. 하고 빈속에 들이킨 소주가 장으로 급히 기어내려 나가듯 뜨겁고 저릿하게 퍼졌다. 황급한 깨달음이 기꺼워 실실 웃어댔더니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미간을 모았다. 오랜만의 깨끗한 각성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없었다. 나는 자주 베였'었'고 손상됐'었'다. 실제로 베인건 그와 그녀인데. 깊은 흔적이 남은 건 내 쪽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날 손상시킬 수 없으므로 대과거 시제를 쓸 수 있다. 완료형 시제라는 건 퍽 아름다운 문법이다. 오염된 채 흘러내리는 ㄹ이라는 세계를 ㅛ가 붙들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그어 놓은 ㅡ 아래로는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좋다. 좋다가 두 번 나와서 좋다. 세 번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황정은의 '베였다'라는 동사에 붙들려 긴 시간 주저앉았었다(이 또한 완료형이다). <작은 일기>를 읽다 말고 그녀의 오랜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좋았었고 좋았고 좋다. 세 번 나왔으니 좋은 중이다. 황정은이라는 인간을 관통해 한 꾸러미로 묶여 있는 모두 같은 인물들. 하릴없는 명랑성을 가졌던 현재형 인물들이 과거형으로 보드라워지는 건 조금 유감이다. 비장함의 결여도 시대정신이겠지. 소설 쓰기를 배울까 잠시 생각한 시간은 베였다는 동사에 유보해 두었다. 아직 손상 중이다. 욕도 더 배워야 한다. 실패와 손상이라는 단어를 여름 내내 입속에서 굴렸다. 나는 손상되었었고 손상되었고 손상되고 손상될 것임이 뻔한데 손상되지 않으리라는 그 무모함에 웃는 날도 있었다. 재생 再生 되고 나면 까끌까끌한 것들이 깎여나가 매끄러워지는 세계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더 이상 베어낼 것이 없어 구인 채로 윤이 나는 스노볼 같은 세계. 용덕면 신촌리의 기억이 선명한 것은 그곳만이 가진 유토피아성을 유실시킬 수 없어 단련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부활 작업. 그렇게 '그들'이 침범하지 않는 세계를 바깥에서 오래 들여다보고 싶었다. 불주사를 맞은 상처가 덧나 보온 메리에 붙기를 여러 번 반복해 생긴 흉이 크고 불룩하다. 윤이 나는 그 살을 만질 때마다 손상당했던 시절들이 떠오른다. 쿵 하고 떨어진 물체 위로 떠오르는 먼지들처럼 겨를 없이 부유하는 것들. 패하여 상한 것인지, 상하여 패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손상이 나쁜 것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때론 나의 세계를 견고하고 반짝이게 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다). 다만 훼손당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기를 원한다. 하여 나를 손상시키려 베인다. 굳어 뻣뻣해진 너를 사랑하기로 한다. 그건 불가항력이다. ㅡ 나와 내가 같은 날에 베였다, 무화



점점 손상돼 가는 '걷는 사람'이 결코 훼손당하진 않으리라는 믿음

그 순전하고도 분별없는 무구를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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