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뭔지 몰라서
어느 날,
율피를 벗긴 밤처럼 뽀오오얀 아이가 전학 왔다. 눈동자엔 습기를 머금은 말간 빛이 깔려있었고 긴 머리카락이 열기로 살짝 달라붙은 듯한 그런 애송이스러운 예쁜 남자아이가.
이승환. 이름이 고급져서 또 감탄했었지.
전포동중에서도 성북국민학교에는 주변의 공장과 상가, 서면 일대의 상권으로 유난히 방치된 아이들이 많았다.
13반에 60여 명 남짓, 게다가 오전반 오후반.
대부분이 꼬질꼬질하거나 시컴둥둥. 간장 냄새가 났었다. 이거 대단히 슬픈 냄새다.
승환이가 어느 날 집에 초대했다. 생일이라고. 엄마가 친구를 데려오라 했다고. 선물 없어도 되니 그냥 가자고.
당시의 우리들은 친구네 집에 간다는 건 초대나 방문, 허락 같은 곱상한 텍스트와는 거리가 먼 이를테면 침투와 비슷한 맥락의 행위들이었기에 승환이의 정중한 초대에 나는 달뜨고 쭈글시러우면서도 설렜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공책 한 권이라도 반짝반짝 뽀시락거리는 포장지에 말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모냥빠지게 빈손으로, 심지어 TPO를 무시한 채 그냥 가도 되나? 나 쫌 교양 있는 려성인데? 류의 생각이 찰나에 스쳤을지도 모른다. 에이 모르겠다 됐고!
승환이의 불편한ㅡ아마도 소아마비ㅡ다리가 남자 친구들과의 단절을 불렀기에 그날의 구성원은 대다수 려성이었을 것이다. 예쁨은 고사하고 단정하지도 못했을 걸로 추정되는 나.
돌이켜보면 초대라는 것에 응당 갖추어야 할 덕목인 드레스나 선물은 고사하고 쩐내만을 장착한 채 쭈뼛쭈뼛 그 집으로 들어갔을 나.
예절따위는 어깨 너머는커녕 가랑이 사이로도 배운적 없는 나. 필시 무례를 범했을 것이다.
아주머니 (그 우아한 분께는 아줌마는 당치 않다!)의 동공 지진을 나는 보지 못했을뿐더러 설령 보았던들 달리 무슨 방도가 있었겠는가.
거 참,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드님을 어찌 이리 잘 키우셨는지요.
등드르등의 사회어를 구사할 순 없으니
뭐. 기껏해야 안녕하쎄요 정도를 쥐어짜내듯이 흘리곤 당당히 입성했겠지.
얘들아, 어서 와
와, 이거슨 아홉 살 려성의 귀가 느낀 최초의 달콤한 말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깨끗한 냄새에 1차적으로 취한 내게 연타로 뚫고 들어 온 꿀보이스. 황홀이라는 단어를 그때 알았더라면 아마 나는 황홀해야 할 순간의 어느 누군가에게나 언제나 저 문장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했을지도.
그날의 생일 파티의 아름다움은 딱 저기까지다.
처음 먹어 본 버터 케이크의 맛ㅡ달콤제외ㅡ도, 음식의 종류도, 파티의 백미 같은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여자 아이가 가져왔을 선물을 머슥하게 바라만 봤을 그 순간도.
아주머니의 분홍색 앞지마와. 얘들아어서와 라는 강력한 텍스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품격이란 것에 대한 기준을 세워버린 혁명적인 그 텍스트만이 소리가 아닌 어떤 감각만으로ㅡ직관ㅡ남아 있다.
그리고
정반대에 위치해 있던 또 하나의 아주머니 우리 엄마. 전포동 이여사.
4교시가 끝나고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도 아홉 살 려성은 제 시각에 집에 가질 않았고
전화도 없던 궁색하고 험한 시절이었기에 이여사는 무척 애가 탔겠지. 정갈하고 향기로웠던 그 집에 반쯤 취한 채 비를 맞으며 반지하 우리 집에 도착한 나는 무얼 잘못한 건지 인지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었다.
희번득이는 이여사가 어둡게, 끝없이 어둡게 꾸중하고 윽박질렀을 때. 세계의 불공정, 불공평에 대해 잠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착한 아이(인척 했던)였던 나는 처음으로 호된 꾸중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뒤집어쓰고는 내가 도무지 뭘 잘못한 건지 몰라 슬프다가 곧 의기소침해졌었는데
드르륵.
고방 유리 문이 달린 단스(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처음 보는 과자였다.
길쭉한 스틱에 초콜릿이 잔뜩 발린.
빼빼로.
맛이 좋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뒤라 더 좋지 않았다.
너무 달콤해 턱까지 쓰라린 케이크란 걸 처음 맛본 뒤라 더더 좋지 않았다.
분홍색 앞치마가 아른거려 더더더 좋지 않았다.
진짜 너무너무너무, 세상의 온갖 부사어를 남발해도 부족할 만큼
썼다.
그땐 사랑이 뭔지 몰랐다.
실은 지금도,
모르겠다.
1983년 여름. 빼빼로가 첫 출시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학교 앞 승환이네 집, 당시엔 학교 근처 평지의 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여전히 성황중인 성북문구와 당췌 하루 매출이 얼마일지 매우 궁금한 동성문구.
성북문구 할주머니는 그때도 할주머니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할주머니. 대단히 미스테리하다.
골똘하게 걸어 갔을 비가 내렸던 그 길. 우리 집은 산동네 골목 반지하였고.
여전히 빼빼로는 별루다.
사랑을 모르고 나는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