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름으로 사는 힘
돌이켜보니 10년 전인 40대 중반부터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지만 뭐 별다른 걸 시도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은퇴 관련 책을 읽거나 관련 기사들을 조금 더 관심 있게 읽은 정도다. 아, 브런치 작가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사실 은퇴 후에 뭘 할지 고민한 결과이기는 하다.
은퇴 준비를 위해 읽은 책 중에 영국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이라는 책이 인상적이었다. 코끼리(거대 조직) 중심의 시대에서 벼룩(개인과 소규모 조직)이 어떻게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통찰력 있게 다룬 책이다. 코끼리와 벼룩으로 회사와 개인을 대체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앞으로는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하는 포트폴리오형 커리어가 중요해진다고 예측했다. 그러려면 조직의 명함이 아닌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힘'이 중요해진다. 회사의 명함보다 자기 이름, 직급보다 자기 브랜드가 더 큰 가치를 갖게 된다.
성공의 정의도 달라져야 한다. 코끼리의 성공은 승진을 하고 그에 따라 연봉이 상승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대신 개인적인 삶을 내려놓고 코끼리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벼룩의 삶에서는 높은 자리와 큰 연봉이 아니라, 본인에게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 자율성, 일과 삶의 균형이 진짜 성공의 기준이 된다. 남들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해진다.
화학과를 나오고 반도체 분야에서 일해온 내게는 코끼리와 벼룩보다는 거대 고분자와 라디칼의 비교가 좀 더 가깝게 와닿는다.
오랫동안 나는 거대한 고분자 사슬의 일부로 살아왔다. 안정적이고 단단한 구조 속에서, 수소나 탄소 원자 하나 정도의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슬의 연결이 끊어지는 시점에 와 있다. 마치 반응을 마친 고분자에서 하나의 라디칼이 떨어져 나오듯 말이다.
라디칼은 작고 불안정해 보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이 새로운 결합을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라디칼은 어디에든 붙을 수 있고, 완전히 다른 물성을 가진 새로운 고분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퇴직 이후의 삶이란 누구의 사슬 속 단위체가 아니라, 스스로 반응성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나는 고분자의 한 조각이 아니라 새로운 결합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라디칼이 된다.
그러나, 라디칼의 치명적인 단점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산소·항산화제·할로겐 등 라디칼을 잡아버리는 물질이 있다면 라디칼은 즉시 활동을 멈춘다. 또한, 라디칼이 주변과 반응하려면 어느 정도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다. 온도·빛·충돌 에너지가 부족하면 라디칼이라도 반응하지 않는다. 잠자는 라디칼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반응을 멈추고 잠자는 상태의 라디칼이 되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는 상태가 될까 봐 가장 두렵다.
라디칼을 반응성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면 새로운 충돌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듯 사람도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력(Input)이 중요하다. 늘 만나던 사람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삶의 반응성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일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주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AI, 양자컴퓨터, 환율, 금리 등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내가 관심이 생겨 공부하는 것은 지겹지 않고 재미있다.
이제 불안정하더라도 반응성을 유지하는 라디칼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