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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19. 2022

눈이 조금만 더 내렸으면 좋겠어.

하원길에 네가 행복할 수 있게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폭설이 예상된다는 메시지도 연이어 오길래 엄청난 눈이 내릴 줄 알았는데 기대만 못하다.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베란다를 내다보니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눈은 다시 내릴 기미가 없다. 좀 전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햇빛도 비춘 것만 같다. 눈이 좀 더 내렸으면 좋겠는데, 하고 바라지만 원래 인생이란 게 그렇듯 간절히 바라면 되려 이뤄지지 않는다.


눈이 좋을 나이는 한참 지났음에도 눈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딸 때문이다. 이제 막 5살이 된 딸은 지난달에 수북이 내린 눈을 밟고 놀며 참 행복해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것도, 그 위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걷는 것도 모두 새롭게 재밌어했다.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너무나 좋아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눈이 와도 항상 위험하다고, 춥다고, 감기 걸린다고 만류했던 지난날 때문에 우리 딸은 그 흔한 부츠 한 켤레, 스키 장갑 한 쌍조 차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으니까.


다시 한번 제대로 눈이 내린다면 누구보다 신나게 놀아주리라 다짐했다. 왕년에 학교 다닐 때 펄펄 눈이 내리면 쓰레받기를 가지고 나가 눈싸움을 하던 전적이 있다. 체력은 그때만 못하지만 다섯 살배기보단 잘할(?) 자신이 있다. 오늘 아침에 내리는 눈을 먼저 보고선 어린이집 가기 싫다 강짜를 부리는 딸을 꼬셨다. 어린이집 다녀오면 눈이 이~~ 만큼 쌓여있을 거고 엄마랑 같이 눈싸움하고 눈 밟고 놀자고.


마르지 않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어린이집에 무사히 등원한 것은 모두 '눈' 덕이다. 분명 엄마 말대로 하원 길엔 눈이 수북이 쌓여있을 것이고 나는 놀 수 있을 것이다, 밤새도록 신나게 놀 것이다, 라는 마음으로 분명 갔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하원을 앞둔 지금 예상만 못하다. 이러다간 그만 다 녹아버릴 것만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약속 같은 것을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성급했다. 아이는 잔뜩 기대할 테고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그런데 눈은 그치고. 이도 저도 못할 상황에 하원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집순이 엄마에게 태어나 집순이 딸인 줄만 알았던 녀석이다. 놀이터 나가는 것도 싫어해서 항상 집에서만 놀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집이 답답하다며 자다 울고 불고 깨버린 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코로나19 때문에 늘 가정보육을 달고 살았다. 집에서 돌보는 게 안전하다 생각했지만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고 매번 놀아줄 수 없어 티브이를 주야장천 틀어준 날이 더 많다.


몇 주 전에 데려간 키즈카페에서 누구보다 신나고 재밌게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난생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상에 흥미를 느낀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결심했다. 많이 나가 놀기로.


그리고 오늘이 된 것이다. 눈이 내리면 뭘 하고 싶은지 둘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른다. 눈을 밟을 거야, 눈싸움을 할 거야, 눈을 만질 거야, 하며 부풀어놓은 꿈들을 오늘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결국은 오늘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고 들어와야 할 판이다.


아주 철없는 생각이지만, 눈이 조금만 더 내렸으면 좋겠다. 폭설 말고, 적당히 소복이 쌓일 수 있을 만큼만 말이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눈에 보일만큼 선명하고도 큰 눈송이가 하늘에서 펑펑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래서 우리 딸과 내가 하원하는 15분 후가 오늘 아침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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