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불고기야. 먹을 만큼만 꺼내서 먹고 남은 건 냉동실에 얼려."
바리바리 싸 온 짐을 하나씩 꺼내며 엄마는 말했다. 이건 진미 오징어채, 이건 멸치 볶음, 이건 취나물, 그리고 이건 뭐냐는 질문에 그건 네가 좋아하는 시장표 김 6봉. 쌀 15kg, 김장 김치 두 통, 그리고 나와 내 딸이 좋아하는 15,000원짜리 딸기 두 팩까지. 넘치고 넘쳤다. 원래는 LA갈비를 해 주려고 했는데 너~~ 무 비싸서 그냥 불고기를 샀다면서 아쉬워하는 엄마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지만 태생이 무뚝뚝한 나는 그저 괜찮아, 나 불고기 좋아,라고만 말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전 날 백화점에서 산 우럭 매운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무뚝뚝한 엄마가 최선을 다해 손녀와 놀아주는 사이, 아빠는 사위와 함께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주방을 오가며 부족한 것들을 채워 가며 그렇게. 받은 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담은 밥상을 채워 가며 그렇게.
차 막히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부모님을 말릴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막히면 끝도 없이 길어지는 시간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 4시간도 채 되지 않아 걸음을 재촉하는 엄마, 아빠를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그리움은 오래도록 이어지는데 만남이 턱없이 짧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어야 진짜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냉장고에서 불고기를 꺼냈다. 당장 나가서 상추도 사고, 마늘도 사서 아침부터 제대로 불고기를 먹겠다는 마음으로 엄마가 싸온 통을 찾아 비닐을 벗기고 뚜껑을 여니, 그 속엔 어제 오후에 차 막힌다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일찌감치 떠나버린 엄마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엄마는 손끝이 아주 야무진 사람이었다. 언제고 무언가 음식을 싸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항상 새 반찬통을 사서 깨끗이 씻어 말린 후 그 안에 음식을 담은 후 꼭 비닐봉지 하나를 얹고 뚜껑을 덮었다. 이동 중에 차 안에서 뚜껑이 열리거나 걸어 다니면서 흔들리면 국물이 흐를 수 있다는 이유로 항상 그렇게 꼭 '비닐'을 얹어 음식을 담아주곤 했다. 국물이 있든 없든, 가볍든 무겁든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보낼 때면 꼭 그렇게 엄마만의 의식으로 포장을 했다. 새 반찬통, 비닐, 그리고 꼭 여문 뚜껑.
비닐봉지를 뜯어 열어본 반찬통 뚜껑 밖으로 비닐이 살짝 삐져나와있다. 분명, 엄마는 통에 맞는 비닐을 찾아 덮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소고기와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팽이버섯을 보니 아주 살짝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이건 누가 봐도 엄마가 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엄마가 아침부터 일어나서 손질해 담은 것. 팽이버섯 밑동을 잘라 결대로 찢어 옆에 얹어 놓은 것까지 완전히 엄마의 손길이었다. 그냥, 엄마 그 자체였다.
아마 차로 1시간 30분 걸리는 딸내미 집에 오기까지 엄마는 몇 날 며칠을 준비했겠지. 우리 딸이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물어보며 카톡을 보내도 속시원히 말 안 하는 딸의 속내를 짐작하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꾸린 짐이었을 것이다. 그중 불고기는 전날 재워두면 혹시 상하거나 맛이 떨어질까 싶어 그날 아침 6시부터 부지런히 준비했을 것이다.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보면 언제 또 볼지 모르는 기약 없는 만남이 아쉽지 않게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준비했을 것이다. 받으면 좋아할 우리의 얼굴을 그리면서.
엄마의 마음이 내게 닿는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도 엄마구나. 이젠 졸업해도 좋을법한데 아직 어리숙한 딸이 걸려 아직도 쉽사리 놓지 못하는.
나는 엄마가 되어도 그녀에겐 여전히 어린 딸이구나. 이젠 내가 해주어야 하는데 다음으로 미루며 받기만 하는.
당장에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낸다. 뭐야, 하며 돌아오는 엄마의 카톡엔 나만 아는 흐뭇함이 묻어 나온다. 누군가를 위한 고생스러움이 흩어지는 방법은 그 '수고'를 온전히 알아주었을 때 가능하다. 꼭 끌어안아줄 정도의 담력이 없다면 내 방식대로 표현해보기로 한다. 완전 엄마 스타일이네, 하고 답하니까 ㅋ, 하고 만다. 장난을 좀 쳐볼까 하다가 멈춘다. 고마운 마음은 그대로 표현해야지 괜스레 꼬아 보내면 잘못 전해질 수 있다. 잘 먹겠다고 고맙다고 덧붙여 보낸다. 지잉-지잉- 답장이 오는데 아뿔싸. 등원 시간이 다가온다.
달군 팬에 불고기를 얹으니 치이익- 소리가 맛스럽다. 자고 있던 아이와 남편이 눈을 뜨고 나온다.
오늘 아침은 불고기. 남편은 이미 침이 고였다. 늦게까지 놀다 겨우 잠든 딸은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투덜대지만, 아마 불고기 맛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그럼,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엄마의 불고기인데.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