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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15. 2022

퇴근 후 맥주 한 잔

워커홀릭의 힐링이란 결국

 "저도요, 저도 오늘 맥주 먹으려고요."


맥주를 마시겠다는 동료의 한 마디에 무심결에 답했다. 으레 괜히 말하는 맞장구가 아니었다. 진심, 순도 200%의 진심이었다. 요 며칠 무리를 해 몸이 마음 같지 않았던 차에 하필이면 목요일이었다. 수요일이 지나고 가장 피로한, 그래서 가장 주말을 기다리는 목요일. 아침부터 찌뿌드드한 몸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남편에게 맥주 한 잔을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오늘만큼은 둘이 같이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를 보며 술 한 잔 하자고. 그래야 긴장된 몸과 마음이 조금이나마 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평소 사무실에서 말을 아끼는 편인데도 '맥주'라는 한 마디에 크게 동요한 것이다. 그렇지, 오늘같이 힘든 날엔 아니 요새같이 버거운 날엔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켜야지,란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니란 사실에 새삼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우리 사무실, 동료들도 다 같이 힘들구나. 그저 입 밖으로 힘들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은 것뿐이구나, 하고.


나 몰래 동료애를 살짝 느끼면서 부랴부랴 일을 마무리했다. 이른 퇴근은 숨쉴틈 없이 일을 해야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남은 일을 처리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가 흩어지기도 전에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오늘은 맥주 마시는 날,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아이스커피 한 잔으로 절대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날, 그래서 내가 먼저 '술'을 마시겠다고 한 날 아닌가. 오로지 목표는 '맥주 한 잔'이었다. 한 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아이가 하원하기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야 했다. 이동하면서 안주를 골랐다. 남편은 교촌 반반 콤보를 나는 김밥 한 줄과 떡볶이 1인분을 선택했다.


최소한의 동선을 확보하며 치킨, 김밥, 떡볶이, 그리고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서 있어서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데리러 나가야 했지만 벅차지 않았다. 손에 들린 서모스비 한 잔으로, 요새 새롭게 뚫은(?) 김밥집의 김밥 한 줄로 이미 마음은 날아갈 듯했다.


하원 후 아이를 씻기고 적당히 만 김밥을 식탁에 얹어 옆자리에 앉히고 본격적인 '힐링 타임'을 시작했다. 골때녀 올스타전을 보며 유리컵 한가득 따른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술이 물 같은 느낌. 물이 술 같은 느낌. 입 안으로 들어가 목젖을 휘감아 내리는 그 칼칼함에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 아는 사람은 너무나 좋아하는. 그래서 한 번 맛보면 절대 멈추지 못하는 그 맛.


단 돈 3,000원에 산 소시지 김밥 한 입을 베어 무니 간도 맛고 담백한 게 꼭 내 취향. 곁들여 산 떡볶이는 너무 매워 다 먹지 못하고 결국 남편의 치킨에 손을 대며 다시 맥주 한 잔 꼴깍. 물처럼 마시니 금세 몸이 편안해지고 알딸딸한 기분이 드는데 왠지 모르게 이상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맥주를 입에 댄 적이 거의 없는 데다가 혹시 먹게 되더라도 늘 아이가 잘 때 먹었던 터라 아이가 옆에서 놀고 있는 와중에 술을 마시는 게 어색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오늘은, 오늘만큼은 모든 걸 내버려 두고 싶었다. 평소 얼마나 긴장을 하고 사는지. 일터에서는 밀린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집에서는 하루 종일 집안일에 뒤치다꺼리하면서 얼마나 숨 돌릴 틈 없이 살고 있는지. 그러다 지쳐 잠들고, 새벽녘에 눈을 떠 출근하는 그 모습을 오늘만큼은 지우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원 없이 늘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옆에서 엄마 이거 보세요, 라며 날 유혹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도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놀아주며 요령을 피웠다. 남편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나를 들볶는 딸을 적당히 나무라며 달래주었고, 나는 마침내 (온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대로 잠들었으면 완벽했다.


그러나, 특히 설거지는 못 참는 선택적 J인 나는 눈앞에 쌓인 설거지를 보자마자 스멀스멀 정신이 돌아왔고 엉망인 거실,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유치원에서 잔뜩 묻힌 스파게티 자국을 참지 못했다.

고무장갑을 끼자마자, 청소기를 돌리자마자, 티셔츠를 손빨래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정신이 번쩍, 하고 돌아왔다. 멀쩡해질수록 할 일이 떠오른 덕에(?) 멸치 주먹밥을, 시금치 된장국을, 김치볶음밥을, 샐러드를 만들어 놓고, 일을 하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쓴다.


쉬려고 했으나 도리어 평소보다 두 배의 일을 더 하게 된 아이러니.

그래도 쉬기도 하고, 일도 더 많이 했으니 워커홀릭인 내게는 썩 괜찮은

'퇴근 후 맥주 한 잔'이 아니었나 싶다.




참나. 늘어지다가 정신 차리고

일할 수 있는 게 좋다고 하니

나도 어지간히 피곤하게 산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행복하게. 편안하게.

굿.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내일도 맥주 한 잔?




Photo by Bra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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