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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레몬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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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5. 2024

맥주

"내가 그 자식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주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고."


벌컥벌컥, 맥주 마시랴

욕하랴, 바쁜 주경을 보니 희수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이 기지배야. 뭐가 좋다고 웃어. 넌 속도 없냐? 엉?"


퇴근 후 들린 맥줏집은 하루의 노곤함을 풀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집에 가겠다는 것을 안된다고, 그놈한테 욕이라도 해줄 거 아니면

차라리 자길 만나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며 풀자고 붙잡은 건 주경이었다.

주경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일단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끝도 없이 잘해주고 챙겨주었다.


이를테면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정기 회의 때 맨 뒷자리 먼저 맡아주기라든가, 맛있는 간식이 나오면 몰래 두어 개

챙겨서 희수 책상에 놓아준다든가, 엘리베이터를 미리 잡아준다든가 하는,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을 잘 챙겨주었다. 희수는 주경의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모든지 무덤덤하게 넘기는 희수에겐 모든지 섬세하게 느끼는 주경이 필요했다.


"마셔. 마셔!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안 그러면 더 화병 난다?"


반쯤 비워진 희수의 잔을 힐끗 본 주경은

아예 새로 한 잔을 추가했다.


"너 이거 다 마실 때까지 나 안가, 알지? 나 한 다면 하는 사람인 거?"


주경의 으름장에 희수는 웃음이 났다.

한다면 하긴 뭘 해. 술도 약하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를 위해 미리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함께 있어준 주경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마실게. 마시면 되잖아."


주경은 그제야 웃었다. 둘의 잔이 챙,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맑게 느껴졌다.

갓 나온 치킨은 희수의 취향이 담뿍 반영된 것이었다.

바삭한 튀김옷이 살아있는 이 치킨을 희수는 좋아했다.

흔히 서로 먹기 위해 다툰다는 닭다리보다도,

닭다리를 감싸고 있는 튀김옷이, 희수에겐 무엇보다도 맛이 있었다.


이상한 입맛이라 처음 느낀 것은

우진 때문이었다.

사수이자 첫 남자친구였던 우진은,

치킨의 튀김옷만 골라 먹는 희수를 경멸하듯 쳐다봤다.

너는, 같이 먹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냐, 고 따지듯 물어보는

우진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황급히 포크를 거두고 미안해, 라며 연신 눈치를 봤던 그날을,

희수는 잊지 못한다.


희수는 튀김옷만 골라 먹는 사람이었지만

우진은 이것저것 가려 먹는 사람이었다는 걸,

희수는 잘못한 일은 빠르게 사과하고 넘어가는 사람이었지만

우진은 잘못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아주 오랫동안 그에게 길들여진 후였다.


- 고작 튀김옷 좀 더 먹겠다는데 뭐 그렇게 말이 많냐,

돼지껍질도 튀겨먹고, 닭껍질 튀김도 있는데, 그럼 그것도 다 이상한 거네?


라고 따져 묻지 못했다.

말하기 전에 천 번은 생각하는 희수였다.

희수가 A라고 말했을 때 우진이 어떻게 말할지 도통 예측이 되지 않았다.

말을 삼키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그렇게 쌓인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은 날이면

어김없이 주경이 연락해 왔다.


"야, 장희수! 뭐 해? 얼른 나와!"


동굴에 갇혀 혼자 생각의 늪을 허우적 댈 때마다

희수를 끌어내 준 것은 주경이었다.

주경은 화끈하면서도 누구보다 무례한 말투로

우진을 욕해 주었다.

침을 튀어가면서까지,

눈앞에 놓인 맥주가 식어갈 때까지

우진의 욕을 늘어놓는 주경의 모습은

희수에게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나도 그렇게 말해 볼 걸,

네가 뭔데 나를 마음대로 해,

네가 얼마나 잘났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나쁜 놈아,


라고 한 마디만 뱉어줄걸.

헤어지는 순간까지

우진은 무례했다.


무례한 사람에게 희수는,

지나치게 예의를 갖췄다.

배려와 존중이 되어 돌아오길

바랐지만, 돌아온 것은

이별이었다.


그것도 환승 이별.






마지막 잔을 비우고

가게를 나왔다.

어느덧 어둠은 짙게 깔리고

군데군데 토악질을 하는 사람,

막차를 잡으려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사람,

휴대폰을 보며 대리기사와 연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진즉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 야, 그러니까 장희수, 너 말이야. 이제 좀 제대로 말 좀 하고 살아라, 엉?


있는 대로 꼬여버린 혀로

세상 진지한 이야기를 마구 뱉어내는 주경을 부축하던 희수는

택시를 잡아 주경을 태워 보냈다.



차가운 밤공기가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서 한 블록만 지나치니

완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주택가의 풍경은

어쩐지 생소했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 빛에 의지하며

한 발짝, 한 발짝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주머니 속에서 사탕을 꺼내 입안에 넣었다.

달큼 새큼한 레몬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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