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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열두달 Oct 22. 2023

느릿하지만 작은 걸음들이 모여

정말, 다시 가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정말, 다시 가볼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긴긴 시간들.     

이젠 찬찬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뚜벅뚜벅 걸어가 본 후 

나를 둘러싼 풍경이 마음이 드는지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둘러보기로 했다.


잠잠히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그 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육아하는 부모가 되기 전,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돌아보았다.


공기업, 대학교, NGO 등 다양한 곳에서 일했다. 그 후론 몇 년간 공무원 수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안정된 삶,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늘 뱅뱅 돌며 고민하다가, 끝내 안정된 방향으로만 발걸음을 돌려왔었다. 특히나 공무원 시험은 몇 년간 준비해 왔었고, 노력을 들인 시간만큼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준비하면 든든한 안정감이라는 울타리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왜 나는 일하는 순간에도, 수험생활을 하는 순간에도 늘 마음속에 내가 가지 않은 한 가지 길이 떠올랐을까? 끝내 그 한 가지 길로는 향하지 않고 다른 길 위에서 내 마음이 원하는 무언가가 그곳에도 있지 않을까 애써 찾으려 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이나 누군가와 뛰어노는 것보다도 마당의 흙과 풀과 돌들로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며 만들어내는 일이 가장 좋았다. 교단에서 책상 아래 내 손이 모두 보인다는 것도 잘 모를 만큼 어렸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항상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만들어냈다. 종이 귀퉁이에도 늘 그림을 그렸고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서투르게 도트 하나하나를 찍고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어보던 시절들이 있었다. 


입사했던 회사에서도 내가 맡은 주 업무들보다도 부수적인 포스터 작업이나, 순서지 등을 내가 만들게 되는 일었는데, 그런 일들이 훨씬 즐거웠다. 그렇게 밤새워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도 즐거웠다. 돌아보면 늘 스스로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밤새워 그리고 만들어도 쉽게 지치지 않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 그림,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지만 상황상 배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 후회 없이 그림과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던 마음이 항상 마음 한편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가장 먼저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 거창하고 멋진 그림과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작은 것이라도 다시 '만들어내자'라고 생각했다. 


꿈을 거창하게 바라볼 때는 너무나 머나먼 꿈과 같아서 꿈으로 향하는 길이 마치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 일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이 길을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것인지, 내게 작은 원석 같은 재능이라도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길로 향하지 않았고, 내 삶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꿈에 가까운 길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첫걸음을 내디뎠다. 가장 배워보고 싶었던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화실 통창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한낮의 햇살을 쬐며 아름다운 색으로 종이를 채워 갔다.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 열매, 바다, 사소한 일상이 담긴 골목길.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들과 풍경을 그려내는 시간은 내 마음을 평온하고 충만하게 해 주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인 부엉이로 그려낸 부엉이 가족 그림은 우리 집 거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우리들을 반겨준다. 작은 행복들을 느끼는 나의 마음이 그림 곳곳에 배어 나왔다.  아름다운 것들로 다채로운 색들로 나와 주변을 채우기 시작했다.


화실을 다니면서 아이를 재운 밤에는 디자인 강의를 듣고 책을 읽었다. 디자인 공부와 스터디 활동을 하고, 디자인과 그림 요소를 제작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한 지원도 했다. 서투르지만 나만의 작은 브랜드를 만들어 디자인적인 도움이 필요한 소상공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디자인 상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이들이 내가 만든 디자인에 점점 반응을 보였고, 내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문의들도 많이 들어왔다.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열정으로 배우고 일하기 시작하니, 1-2년 만에 차근차근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일하는 과정에서의 힘든 것들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또 누군가가 나의 색이 담긴 디자인을 찾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내 디자인이 자신의 취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굉장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실행해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결과물들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그것에 대한 반응과 나의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있다. 세상에 나를 다시 발을 내딛고 나를 내어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보고, 표현하고, 그런 것들로 누군가에게 미적인, 때로는 실용적인 도움까지 줄 수 있다니, 나에겐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부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이 일을 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해야만 움직이곤 했던 나는, 늘 꿈을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앞에서 망설이기만 했던 나였다. 지금은 우선은 시작해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나하나 직접 해보면서 변화시키고, 생각을 수정하고, 나아간다. 


높은 목표를 세워두고 달려가는 것이 더 효과적인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꿈이나 목표를 1등으로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세워두면 더 치열하게 노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레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워지더라는 것이다.

      

너무 높은 장벽을 스스로 세워두고 아예 다른 세계의 일로서 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상황에서 해볼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천천히 경험하고 부족함을 발견하고 채워가고 그렇게 준비해 가는 것이 나에게는 잘 맞는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도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배울 수 있고 알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여러 가지의 일들을 경험해 보고 지금의 길로 들어선 만큼 큰 동기부여를 가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공부하게 되는 점도 감사한 일이다.      


70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30년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리셨던 모지스 할머니를 늘 떠올리곤 한다. 나는 30대에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충분하다. 행복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의 이 느릿한 듯 내면의 열정이 가득한 이 여정 속에서 오늘도 여전히 나는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누군가의 눈과 마음을 아름답게 해주고 싶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오래오래 할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을 해본다. 


나의 색을 만들어가고, 나의 색을 찾아주는 이들. 이 일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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