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못 본다고?” 그날 밤의 집단 패닉

마추픽추도 환불도 귀국도 불가능했던 그날 밤의 대치

by ANNA

새벽 4시 출발이었는지 5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운 시간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지친 손님들을 이끌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조식은 꿈도 못 꿨다.
밀박스를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호텔을 잡아준 회사도 조식을 챙길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항공은 어메리칸 에어라인.
간신히 체크인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데, 그 멘붕 와중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아침 먹을 시간이구나.
기내에서 먹겠지..

응? 기내라고?


이 항공 루트는 LA – 마이애미 – 리마.
인솔자로서의 경험상 국내선에서 기내식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손님들은 비행기를 놓쳐 예상에도 없던 LA 일박을 하게 됐다.
그런데 몇 시간씩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도 굶겨야 한다고?

마이애미에서 리마로 가는 구간은 안봐도 뻔하다.
샌드위치 하나에 음료 하나가 전부일 것이다..
길진 않지만 다양한 항공을 타며 몸으로 익힌 국룰이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 역시 기내식은 없다고 한다.

그럼 방법은 하나다.

LA 공항에서 문 연 식당.. 아니, 비행시간이 임박해 그건 어렵고, 뭐라도 열린 곳을 찾아 샌드위치랑 음료라도 먹여야 했다.

마침 근처에 던킨이 있어 샌드위치와 음료를 후다닥 주문했다.

LA 공항 물가 진짜 미쳤다.

하아.. 이 도둑놈의 쉐퀴들


비행기 놓친 일이 처음이니, 그 이후 벌어지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고 어설프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해결할 상황은 생기니 다행이긴 했다.




그렇게 일단 아침 식사 소동을 진정시키고 마이애미로 출발했다.

급하게 항공권을 구하다 보니 나와 부부 한 팀, 그리고 여자친구 한 팀은 본팀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두 시간 뒤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배정됐다.

첫 팀의 환승 시간이 꽤 빠듯했다.

LA 공항에서 그 사단을 겪은 뒤라 손님들의 불안은 극에 달해 있었지만, 나 역시 마이애미 공항은 처음이라 확신 있게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행히 미국 국내선은 짐을 찾았다가 다시 부치는 번거로운 과정이 없었고, 정말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내린 게이트가 다음 탑승 게이트 바로 옆이었다.
이미 보딩이 시작된 상태였지만 손님들을 신속하게 태울 수 있어서 첫번째 위기는 넘겼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멤버는 긴 대기 시간을 견뎌낸 끝에 마침내 리마로 향하는 항공편에 탑승했다.


손님들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리마에서 손님들을 맞이할 가이드에게 계속 연락하며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마추픽추 투어를 못 하게 됐다는 통보를 그 가이드에게 맡겼다.

비겁하다.

하지만 항공편을 놓친 일을 수습하느라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그것을 직접 감당할 병아리 눈물만큼의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리마 가이드는 그 부분을 전부 맡아주겠다고 했다.
일차 폭격은 피한 셈이었다.


마이애미에서 리마로 가는 비행편.

대체 몇십 시간을 뜬눈으로 버틴 걸까?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리마에 도착해 있었다.




입국 심사장으로 가는 길,
벽면에는 마추픽추의 환상적인 풍경 사진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걸 본 손님들이 말했다.
아우, 내가 이거 보려고 여기 왔잖어. 너무 기대되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 마추픽추를 못본다는 이 절망적인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지?


머나먼 페루 리마.
LA에서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도착하니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짐을 찾고 가이드 미팅을 했다.
역시나 가이드는 나를 보자마자 우려 섞인 말을 꺼냈다.

손님들이 완전 난리 났어요. 다들 돌아가시겠다며..


이해는 간다.
비행기를 놓쳤다.
마추픽추를 못 본다.

사실 비행기를 정상적으로 탔어도 전날 시작된 기차 파업으로 마추픽추를 보기는 불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비행기를 놓치며 고생한 손님들에게 그런 변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해 손님들을 소집했다.


분노에 찬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날 밤은 내 인솔 생애 최악의 시간이었다.


손님들은 당장 귀국편을 요구했다.
여행 약관상 돌아가더라도 한 푼도 환불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가이드와 내가 사정사정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난과 욕설뿐이었다.
현지 랜드사 사장 호출까지 요구했다.

사장님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대신 아들이 왔다. (사장님은 얼마 후 돌아가셨고, 이후 아들이 대표로 취임해 또 다른 인연이 이어졌다.)

여행사 관계자와도 긴 통화를 이어갔다.
무조건 손님들을 잡으라는 여행사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손님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느라 정말 쓰러질 지경이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투어 중 마추픽추 파업이 풀릴 가능성이 있으니, 그때 일정이 늘어나더라도 추가 방문을 추진해 보겠다는 것.

그래서 겨우 진정된 손님들을 전원 쿠스코로 이동시키며 남은 투어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결론이 난 시간은 새벽 4시.
5시 조식, 7시 출발.

남은 시간은 단 30분.

풀지도 못한 짐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 앉아 공허하게 다음 일정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때 돌려보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 고비 넘기긴 했지만 그 이후의 투어가 더 큰 재앙이 되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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