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밑줄과 생각』
정용준의 『밑줄과 생각』을 읽는데 자꾸 손이 멈춘다. 빌린 책이라서 형광펜을 쓸 수도 없는데, 할 수 없어 마음속 어딘가에 줄을 그었다. 광역 버스를 타고 잠실역까지, 거기에서 환승해 역심 역까지, 내가 자주 가는 이 노선 위에 읽는 책들은 모두 다르지만 밑줄 긋는 마음은 늘 같다. 그런데 진짜 솔직히 말해볼까? 몇몇의 책은 다른 마음이 든다. 좀 징그러운 표현일 텐데, 말하자면 어떤 책의 문장들은 단순히 밑줄이 아니라 문신처럼 겨드랑이 아래쪽, 팔을 내리면 안 보이는 곳에 새겨버리고 싶다.
최근에 좋아하게 된 MUJI의 올리브그린 색과 연회색 형광펜을 밑줄과 생각에 밑줄 긋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다. 이렇게 좋은 문장에는 반드시 올리브그린 색의 밑줄을 그어야 하는데, 세상에, 이 사람의 사유는 정말이지 참신하고 깊구나. 그렇다면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한 회색의 형광펜이 맞춤처럼 어울리지. 책을 읽고 밑줄을 긋는다는 건 특별한 순간을 위한 특별한 도구를 쓰는 셈인 것이다.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작가가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했다.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으니)
자기의 소설을 알리려고 가볍게 쓴 산문이겠지. 아니면 출판사의 권유에 못 이겨 오래전에 써 놓은 글을 급하게 묶어 내놓은 산문집쯤으로 생각했다. 요즘 서점가에 흔한, 일상을 소재로 한 에세이 정도로. 하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알았다.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정자세로 앉아 읽어야 하는 수작이었다.
책을 쓰는 도중에 읽게 되는 책은 뭔가 대단하다. 평소와 똑같이 골라 읽는데도 이상하게 베스트 중 베스트만 고르게 된다. 안 그래도 기가 꺾인 나에게 회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신의 장난질 같다. 어제 읽은 이석원 작가로도 나는 충분히 기가 꺾였는데 결국 오늘 이 책으로 좌절의 방점을 찍었다.
네가 무슨 글을 쓴다고 깝죽거리니? 어떤 글을 써야 되는지 보여줘? 이 정도가 아니면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걸. 자존감을 구겨버리는 혼잣말.
이 책을 쓴 작가는 어느 날 우연히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글 쓰는 손을 멈추게 했으나 김수영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쓴 『자책하며 쓴다』라는 꼭지에서는 강제로 멈춤을 당하고 자판 위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내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나는 이 책을 통해 병과 약을 모두 받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침울해진 기분을 금방 회복하기는 힘들 것 같다.
포기하지 못하는 글쓰기에 대한 마음, 살이 탈 것 같은 뜨거운 날씨, 주말이 시작되어 느긋해진 오후, 주먹 두 배 만한 참외에서 나는 다디단 향, 그리고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는 이놈의 기분. 내 인생은 늘 기분이 문제다.
하지만 분명해졌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인생의 밑줄이라는 사실. 형광펜으로 그어지지 않았을 뿐, 나는 매 순간 무언가에 밑줄을 긋고 있다. 그 밑줄들이 모여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밑줄과 생각. 결국 이 둘은 하나다. 삶의 순간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긋는 선들, 그리고 그 선들을 따라 이어지는 사유들. 정용준의 책은 그런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