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처럼.
짧은 가을, 여운만은 짙게 남기고 싶다면
탱고가 필요하다.
누에보 탱고의 창시자 피아졸라는
탱고가 행복한 음악이 아닌 슬픈 음악이라 말한다.
슬픈 음악이라 하면
흔히 블루스를 떠올리게 되지만
블루스는
일상 속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고,
리듬을 타며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에서
단지 '슬픈 음악'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다.
이는 블루스를 연주하는 이들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침울하고 무기력해 보이기는커녕
점차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그루브를 타며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가.
블루스에는
리듬감, 즉흥성과 같은 아프리카 음악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
그렇지만 지중해 음악인 탱고는 다르다.
블루스를 들을 때는
그루브를 타며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개운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지만
탱고는 들을수록 애수의 깊은 골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낮게 흐르는 밤의 개울물,
악을 쓰듯 붉은빛을 퍼뜨리며 지는 석양,
저 멀리 부두에서 손 흔드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 같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막을 가져다준다.
한 번 느낀 슬픔은
곡이 끝날 때까지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도 아름다워
슬픔으로부터 떠나고 싶지가 않다.
어둠 속 붉은빛 선율을 닮은 장미에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음악은 끝나도
애수는 짙으니
가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