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이유도 가지가지

행복한 또라이

by 보라

강릉으로 와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 전공, 경력과는 전혀 다른 일자리로. 세상은 넓고 일자리는 많지만 나에게 알맞은 일자리는 흔하지 않았다. 경력도 없는 40세 신입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한참을 알아보다 동물병원 데스크 직원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최저 시급을 주며 단순한 안내, 계산 업무라고 했다. 대기하는 환자(동물친구들)가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짧은 인사를 하고 수의사는 진료실로 사라졌다. 내 옆에서 대기하던 환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면접 약속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혹시나 날 잊었나 싶어 면접 대기 중이라는 메모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답과 함께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렇게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데스크 직원에게 짧은 메모를 써서 원장님께 전해주라고 했다.

“ 두 시간. 저의 소중한 시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 집사이기도 한 나는 그 병원은 가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면 동물에 대한 예의는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다음 면접 장소는 약국이었다. 큰 병원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작지만 아담한 약국.

여기서도 최저시급을 주며 일은 단순하다고 했다.

“여기는 약국이라 물어볼게요. 혹시 질병이 있나요?”

“있어야 하나요?”

“저희는 오래 일할 사람을 찾아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내 이력서를 보고 약사는 맘에 들어했다.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계속 몰려오는 환자들의 처방전을 보며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익숙해지느라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다음날 고객을 상대하고 있는데 잠시 조제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조제실 직원과 약사 부인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일하고 있었다. 날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조제 기계를 껐다가 켜면 전력 손실이 크니 내가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크게 해서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교실에서 수업하던 내 발성은 결코 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커서 울린다고 할 정도였다.

“라디오 소리를 조금 줄이면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까요.”

그 말이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퇴근 무렵 약사 부인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랑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오늘까지 일한 것은 계좌번호 주면 보내드릴게요.”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에 들렀는데 알바를 구한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늘 가방 안에 이력서를 가지고 다녔던 나는 바로 사장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 이력서를 한참 들여다보던 사장님이 한마디 했다.

“ 편의점 알바하기에는 경력이 너무 좋네요. 저희는 최저시급밖에 줄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최저시급만 줘도 괜찮다는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장을 뒤로하고 난 돌아섰다. 사람을 거절하는 이유도 참 다양하다.


생각보다 일자리를 알아보는 건 쉽지 않았다.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하염없이 푸르른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있다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내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신 것은 다 계획이 있어서다. 바다도 보고 면접도 보고. 여긴 카페와 스테이를 함께 운영하는 곳으로 직원을 구하고 있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자차도 있고, 바다와 커피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만 빼고.

“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로 문의드리고 면접 온 사람입니다.”

“ 아. 네. 생각보다 나이가 있으시네요. 저희는 젊은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다들 어려서 나이 차이가 있으면 함께 일하기가 어려워서요.”

나름 동안이라 자부했는데 20대들 앞에서는 그것도 소용없었다. 나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단 한 가지. 근데 지금 내 앞에서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 근데, 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시는데 다른 직원들이 함께 일하기 불편해하지 않겠어요?”

내 말에 옆에서 컵을 정리하던 직원이 피식하고 웃었다. 얼굴이 붉어진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비가 온다. 기분이 좋다. 날이 구질구질한 게 딱 좋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비를 좋아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으면 그보다 더 시원한 건 없었다.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도 좋았고 다른 사람들이 우산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도 좋았다. 모두를 왠지 모르게 겸손하게 만드는 공평한 비. 날이 화창하면 모두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 부시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달랐다. 모두가 다 숙연한 표정으로 피하기 바빴다. 웃는 건 나뿐이다.




그의 시선


새로운 사업의 시작이 별로다. 비도 오고 계약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온 계약서는 형편없었다. 아무래도 이 사업은 접어야겠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땐 역시 커피가 최고다. 그를 먼저 보내고 나 혼자 여유 있게 커피를 마셔볼 셈이었다.

펜션 사업을 하는 나는 타고난 사업 수완 덕분에 일찍 성공을 했다.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는 동안 신기하리만큼 운이 따라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다. 사람 운만큼은 따라주지 않았다. 가족처럼 아끼던 직원들은 수시로 바뀌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자를 따라 서울로 갔다. 아무 기대 없이 소탈하게 웃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상담하던 의사는 마음을 내려놓고, 기대를 버리면 웃음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런 말은 절에서도 들을 수 있다. 시간 낭비를 한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들었는데 저쪽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났다. 근데 문이 아니라 카운터로 간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듣던 나는 큭 하고 웃고 말았다.

‘저거, 또라이네.’

내가 웃었다. 잠시지만 웃었다.

그녀는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나이도 좀 있어 보였다. 근데 눈빛이 살아있었다. 분명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눈빛은 꿰뚫는 듯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온 사람의 굽신거리는 태도는 없었다. 몸 전체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당당함 그 자체였다.

뒤따라 나가 멀어지는 차 번호를 적었다. 순전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다. 저 사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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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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