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은 맞닿아있다

행복한 또라이

by 보라

출근길

출근하는 길.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불과 몇 주 전에 느끼던 아침 공기와는 사뭇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새삼스럽게 출근길의 낭만을 즐긴다.

내가 출근하는 곳은 인터넷으로 고객의 맞춤주문에 따라 물건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보내는 답례품 업체이다. 그러다 보니 변변한 간판도 없고 회사 규모도 가내 수공업 정도로 직원이 나 포함 3명이다. 정규직도 아니고 주문이 있을 때만 일하는 일종의 아르바이트. 처음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갔을 때 사장님은 날 보고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 같지 않은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 머리 쓸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맘에 들어요. 손으로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요.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배워볼게요.”

나의 해맑은 웃음에 사장님은 반신반의하면서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셨다.


✔ 쉬어가는 시간

지금 난 내 인생의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살기 위해, 내게 주어진 수명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스트레스 적은 삶을 살기로 했다. 공교롭게 이 모든 게 내 나이 40세에 시작되었다.

IMF세대인 나는 등록금이 싸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립 사범대에 갔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연년생인 동생이 있다는 건 나에게 대학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과에 특차로 합격했고 그렇게 순탄하게 교사가 되었다. 같은 과 선배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하여 부부교사가 되었고 예쁜 딸도 낳았다. 하지만 ‘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는 동화 속에만 있는 문장이었다. 유별난 학생들과 학부모를 상대하느라 내 건강은 점점 망가졌다. 얼굴 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떨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안면마비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가정적이고 말수가 적은 남편은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일들을 상상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계획 이혼을 했다. 지인 중 어떤 이는 나에게 참고 살지 그랬냐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 바람피운 거 빼고는 완벽하지 않냐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완벽한 나의 인생에 문제가 없는척하며 연기할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하기에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것일까. 내 심장도 망가져갔다. 의사는 더 이상 약을 쓸 수 없다며 수술만이 길이라고 했다. 난 살고 싶었다. 열심히 살아온 것 밖에 없는데 이대로 수술실에 생사를 맡기는 건 억울했다. 넘치게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면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면 적어도 내 수명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 커피의 천국으로

심장이 아파서 의사에게 갔을 때 의사는 나에게 술, 담배, 커피, 스트레스를 끊으라고 했다. 담배는 애초에 시작도 안 했고, 술은 맘먹고 끊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커피는 내 영혼의 위로자였다. 하루의 시작과 중간, 끝을 함께 하는 친구. 커피 한 잔 맛있게 먹기 위해 한반도의 끝과 끝을 당일로 다녀오는 나에게 커피를 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커피를 하루에 딱 한 잔만 정말 맛있게 먹기로 했다. 해마다 커피 축제가 열리고 바다와 산을 보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강릉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렇게 내 인생의 후반부는 커피의 천국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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