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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Sep 06. 2024

틀리기 싫어하는 아이

엄마표 수학 협상안


작년 말, 초2였던 첫째가 다니던 학원은 4개였다.

공부방(국어,수학,한자 주4회), 영어(주5회), 피아노(주5회), 태권도(주5회).

학교가 끝나고 릴레이식으로 이 학원 코스를 쭉 돌고 나면 벌써 해가 어둑어둑 해진다. 수학과 영어는 양이 많지는 않지만 나름의 학원 숙제들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가기 직전에 한다던지 하면서도 내내 짜증을 냈다. 좋아하던 책 읽을 시간도 없고 아이 에너지가 이 모든 것을 다 소화하기는 아직 무리인 것 같았다. 이제 초등 고학년이 되면 정말 엄마보단 학원에서 전문가 선생님과 공부해야만 하는 시기가 올 텐데, 저학년일 때라도 집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독서도 마음껏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히 공부하는 학원들을 싹 내려놓고 집에서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덧 초3 2학기 9월이 시작됐다.






# 1. 그렇게 채점하지 마


솔직히 엄마가 학원을 보내는 이유는 공부 때문에 아이와 관계가 나빠지고 싶지 않아서다. 아이가 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수고했다 말하며 맛있는 간식을 챙겨주고 응원해 주는 그저 따뜻하고 착하고 좋은 엄마로만 남고 싶은데, 소위 말하는 '엄마표'로 아이를 서포트해주려면 그만큼 공부 진도와 숙제 확인 등등 밀착 케어를 하다 보니 아이와의 부딪힘이 없을 수 없다.


특히 아이가 어려워하는 과목인 수학에서 가장 예민해진다. 아이는 수학 문제 1개 풀기 vs 책 1000권 읽기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자기는 주저 없이 책 읽기를 하겠다고 했다. 책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수학을 못 한다고 생각해 미리 겁먹고, 그러다가 긴장하고 실수하면서 틀리게 되니 더 싫어하게 됐다.


집에서 수학을 하면서 첫 번째로 부딪힌 부분이 바로 <채점 방식>이다.

아이가 학원에 다닐 때 문제집을 완북했다거나 다 마친 교재를 가져와도 그냥 쓰윽 훑어보고 잘했네 칭찬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아이의 문제집을 채점하면서 어떤 부분이 약한지를 체크하다 보니 직접 설명하며 알려줄 부분들이 생겼다. 채점을 할 때 빨간 색연필로 틀린 문제에 '/' 이렇게 작대기를 그었더니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아 그렇게 좀 채점하지 마!!!!"


순식간에 째려보는 눈이 되어서는 씩씩 거리고 울면서 빨간 작대기를 지우개로 벅벅 지웠다. 아니 틀린 거 채점한 건데 이게 왜? 사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잘 이해는 안 됐지만 틀렸다는 표시가 너무 냉정했나 싶어서 나름 '☆' 별표로 바꿨더니 그러면 틀린 게 엄청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나 뭐라나 하며 그것도 싫단다. 아니 무슨 채점 방식 하나 갖고도 이렇게 예민해서는 어쩌라는 건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협상에 들어갔다. 아이와 여러 대화를 나누고 서로 정한 건 'v' 식의 체크 표시였다. 너무 크게도 작게도 말고 딱 적당한 사이즈 그 정도로만 체크해 달라고 한다. 처음엔 진짜 이상한 걸로 태클을 건다고 생각해서 부글부글 했지만 이내 아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기분 좋게 공부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원 선생님은 요청대로 다 받아들여줄 수 없지만 집에서 하는 엄마표니까 가능한 얘기였다. 오케이, 그렇게 해주마.

무심해보이지만 나름 엄청 신경 쓴 V 표시 채점




# 2.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다음은 내 말투에 대해 클레임이 들어왔다. 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어둔 과정을 보면 중간에 실수하고 틀릴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설명해 주면서 "00야 이게 아니라~" 또는 "이게 맞아?" 또는 "여기 틀렸네", "그거 아니야"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아이는 또 표정이 일그러진다.


"엄마, 그런 식으로 좀 말하지 마."


아니 내가 뭘? 혼낸 것도 아니고 소리 지른 것도 아닌데 대체 뭔가 문제란 말인가. 엄마가 말하는 것들이 다 너무 혼나는 것 같고 자기가 틀린 게 자꾸 생각나서 눈물이 난단다. 엄마는 안 무섭게 말한다고 하지만 듣는 본인은 듣기 싫다고 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일단 참고, 그럼 어떻게 말해주길 원하냐고 물었다.


"상냥한 말투로 '00야 한번 더 봐봐'라고 해줘."


의외로 원하는 게 별거 아니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오케이. 그렇게 할게. 까먹을까 봐 칠판에도 적어뒀다.

잊지 말자 명령어



# 3. 중간에 알려줘서 내가 풀기 싫어졌어


틀린 문제를 아이와 다시 풀어볼 때가 있다. 쭉 푸는 모습을 보다가 또는 아이가 칠판에 직접 풀어가며 설명할 때가 있는데 중간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아 잠깐" 하면서 바로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또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입이 삐쭉거려 벌써 눈이 세모눈이 됐다. 이번엔 또 뭐니.


"엄마가 중간에 알려주니까 풀기 싫어졌어. 내가 틀렸다는 거잖아. 틀리니까 짜증 나."


아니 그럼 틀린 거 알려주려고 내가 있는 건데 알려주지 말라고? 속에서 열불이 났다. 다시 숨을 고르고 그럼 어떻게 해줄까 물었더니 자기가 틀려도 다 풀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다 풀었는데도 틀렸으면 저번에 말했던 처럼 상냥한 말투로 '00야 한번 더 봐봐'라고만 해달랜다.


아 엄마가 또 조급했구나. 오케이. 알았어.






그렇게 엄마표 수학 협상안 3가지가 정리됐다.


1. 틀린 문제는 적당한 사이즈의 'V' 표시로 채점하기

2. 틀렸을 때는 상냥하게 '00야, 한번 더 봐봐'라고 해주기

3. 문제 푸는 중간에 답을 알려주지 말고 끝까지 기다려주기





# 육아는 결국 인내와 기다림이 전부다


처음에 아이가 수학 공부를 하며 불만을 말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 걸로 까탈스럽게 군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 받아주다가 더 버릇 없어지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 정리한 협상안을 보니 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보였다. 아이는 스스로 해보고 싶었고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 크게 드러나는 게 부끄러우니 시간을 주고 좀 기다려달라는 뜻처럼 읽혔다.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은 안다. 신생아 시기에 조급했던 초보엄마 시절 자신의 모습을. 얘가 왜 뒤집기를 안 할까, 왜 빨리 말을 안 할까, 수유량이 적네, 이유식을 잘 안 먹네, 다른 애들은 걷는데 얘는 언제 걸음마를 할까, 언제 글씨를 읽나, 언제 글자를 쓰나. 숫자를 아나, 덧셈 뺄셈을 할 수 있나, 알파벳을 아나 등등등....

당시에 꽤나 심각해 보여서 조바심이 났던 문제들이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닌 걱정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묵묵히 자기 앞에 있는 미션들을 하나하나 성공하며 성장했다. 애들마다 속도가 좀 다를 뿐이다. 엄마는 그저 인내로 기다리며 아이를 응원해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늘 그걸 까먹는다.


첫째 아이는 틀리는 걸 싫어한다. 틀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본인이 틀렸다는 걸 깨달으면 그때부터 감정조절이 잘 안 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온라인상에서 찾아보니 여러 조언들이 나온다. 더 많이 틀리는 경험을 해서 틀린 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틀려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법을 익혀야 한다, 틀린 걸 찾기 위해 공부하는 거라는 걸 알려준다, 오히려 틀려서 축하한다고 해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다 등등 나와 비슷한 기질의 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엄마들의 생생한 글들이 이어진다. 그 모든 조언의 공통점은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 이것만 고쳐주면, 이렇게 빨리 잡아주면 같지만, 아이 스스로 있도록 그저 기다리고 묵묵히 지켜보는 오히려 가장 빠른 길인 듯 싶다.






수학 문제가 무섭다고 울면서 풀던 두 페이지. 눈물 자국으로 너덜거린다.


다음 날 아침 혼자 일어나서 풀어 둔 모습이 기특해서 쓰리별표를 날렸다.





그래서 협상안을 적용했더니 아이가 하루아침에 짜증도 전혀 안 내고 틀리는 것도 좋아하고 모든 수학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 다 맞는 아이가 됐나?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지금도 아이는 여전히 틀리면 예민해지고 짜증도 내면서 울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기다리려고 노력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자기도 틀렸다고 바로 포기해버리지 않고 울더라도 끝까지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10번 울었던 걸 2번 우는 정도로 순화 됐다. 엄마인 나도 중간중간 틀린 걸 바로 짚어주려다가 움찔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그게 아니라"라는 말이 튀어나와 입틀막을 하고 사과한다. 아차 싶어서 다시 상냥한 말투로 "한번 더 봐봐"라고 말하고는 숨을 고른다. 그렇게 아이도 엄마도 조금씩 성장 중이다.


전쟁 같은 수학 시간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우리 집 루틴인 굿나잇 인사를 한다.

"(머리 위 하트 만들면서) 엄마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꼭 안아주면서) 그래 고생했어. 엄마도 사랑해. 잘 자. 내일 보자."


이렇게 살얼음판 같은 엄마표 수학을 하면서도 여전히 아이와 따뜻한 굿나잇 인사를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기다려주는 육아의 미덕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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